도서명: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 저자: 박서원 출판사: 동아일보사 차례 프롤로그 4 제 1 장 세상의 비밀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아이 텅빈 유년의 뜨락 13 미운 오리새끼는 어디로 가야 하나 18 어린 딸에게도 아빠의 병이... 25 이문동의 가난한 3남매 29 엄마, 엄마, 파랑새는 어디에 35 엄마의 남자 38 제 2 장 피리새는 피리가 없다 초경의 기억 51 여자 신문팔이, 여자 구두닦이 56 고집스러운 17세 소녀의 방황 68 비로소 꿈꾸는 젊음 72 하느님, 하느님 80 죽음의 신에게 인심을 잃었다 88 천형과도 같은 희귀 신경증 102 기나긴 투병생활 107 제 3 장 9년의 숨은 사랑 내 인생에 비쳐든 햇살 115 남자로 다가온 '작은아버지' 123 지옥에서 보낸 한 철 135 그는 늘 먼 곳에 141 외딴 우리들의 방 150 둘만의 세상 160 다시 타인으로 돌아간 그 167 내 안에 촛불을 밝히고 173 악몽 속에 피어난 시 181 그대 떠난 자리에 홀로 191 제 4 장 비탈 위에 집짓기 119구급대원의 청혼 199 전혀 다른 빛깔의 사랑 206 5월의 신부 212 또 다른 이별을 맞을 때 216 헤어진 부부인지, 결혼할 연인인지 224 껍질 속에 갇힌 아이 229 나를 키운 아들 치민 이 236 볕 잘 드는 집 244 저자 소개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서원 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18세 때 성폭행을 당한 후 신경쇠약과 희귀신경증인 기면증의 발병으로 자살을 기도했던 그는 24세에 스물 두살 연상의 대학교수와 극적인 사랑을 하게 되면서 시인으로 거듭났다. 현재 그는 이혼한 동생의 아들과 노모를 돌보면서 문학에 제 2의 인생을 걸고 있으며 카톨릭 신앙을 버팀목으로 기나긴 투병생활을 꿋꿋이 견뎌가고 있다. 89년 <문학정신>에 '학대증' 외 7편의 시를 발표하여 문단 데뷔 시집 <아무도 없어요>, <난간 위의 고양이>, <이 완벽한 세계> 등이 있다. 프롤로그 새벽 4시. 주위는 어둠에 싸여 있다. 집 앞 가로등이 고장난 지 며칠째. 인공의 불빛이 스며들지 않는 태초의 밤 그대로의 어둠이 좋다. 어머니 자궁 속 같은 포근한 어둠. 어둠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자궁의 어둠은 생명을 잉태하는 창조의 공간이 아닌가. 어둠 없이는 빛도 없다. 어둠은 제 안에서 빛을 키워 세상을 밝힐 생명을 출산하는 것이다. 서른 아홉 해를 살고서야 나는 내내 나를 감싸고 있던 어둠의 따스함을 받아들인다. 먼 골목 입구에서 취객의 비틀거리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나는 아무도 못 듣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인데도 수직으로 땅 위에 내려앉는 나뭇잎 소리가 내 귀에는 들렸다. 무슨 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크리넥스 한 장이 떨어져 있기도 했다. 미세한 소리도 포착하는 내 귀에 세상은 온통 소음이었다. 이제 취객의 발소리가 내 창 앞을 지나간다. 내 신경은 보통 사람보다 7배나 예민하다고 한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소리조차 내게는 소음으로 들려오는 것이다. 남달리 예민한 신경을 갖고 태어난 것 자체가 내 비극의 출발이었는지 모른다. 예민한 신경은 결국 기면증이라는 희귀한 신경증으로 이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 곳에서나 쓰러져 잠에 빠져드는 희귀한 병. 정신이 들었을 땐 한낮의 길거리, 차들은 내 옆으로 쌩쌩 스쳐가고 무수한 낯선 얼굴들이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동정과 연민과 불쾌함이 동시에 담겨 있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죽고 싶었다. 알몸으로 그들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열 일곱 나이에 모진 세상에 발을 디뎠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낯선 남자의 등에 업혀 산동네 우리 집을 찾아들어야 했던 시절, 주머니를 털어 한 알씩 수면제 를 사 모으면서 날마다 나는 죽음을 꿈꾸었다. 그런 내 황량한 삶에도 한 가닥 빛은 있었다. 내 삶의 등불이 되어 준 사람. 그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해온 내가 한 사람의 여자로, 당당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독오른 나를 처음으로 따뜻이 품어준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는 내가 나의 어둠과 싸워 이겨 세상 속에 굳건히 서길 바랐다. 나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병과 싸워가며 글을 썼다. 글을 쓴다는 건 또 다른 고통이었다. 시상이 떠오르면 잠들 수가 없었다. 한편의 시는 한편의 추억이었다. 기를 쓰고 도망쳐온 추억 속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악몽과도 같았다. 내 마음에 숨겨진 온갖 두려움이 잡귀가 되어 내 잠을 방해했다. 때로는 쓰던 시구가 영상으로 글자로 밤새도록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고 나면 다음날은 어김없이 쓰러졌다. 그래도 그를 생각하면 주저앉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나의 연인이라 말할 수 없었던 그. 그이 없이는 숨도 쉴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있었는데 이제 그는 나를 떠나 있다. 약물로 하루하루를 지내야 하는 신경증도 여전히 몸의 일부처럼 나와 함께 있다. 병을 치유하기 위해 장기간 약물을 복용해 중독된 내 몸은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모의 땅, 내 자궁은 생명을 품지 못한다. 그런데도 나는 내 몸과 영혼이 익을 대로 익어 충만함을 느낀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시 면류관에서 피가 흐르고 십자가에 박힌 손발에서 피가 흘러도 충만한 사랑이 있지 않았는가. 잠 못 이루는 밤마다 내 안의 어둠을 생각한다. 생명조차 품지 못하는 나의 어둠 그러나 나는 생명 대신 시를 품었다. 내 어두운 자궁에서는 시가 자라고 나를 떠난 그가 자라고 내가 낳지 않은 나의 아들 치민 이가 자란다. 불모의 여자, 여자 아닌 여자, 그런 내가 그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온전한 여자가 된다. 여자의 자궁은 남자의 정자를 받아 아이를 키우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다. 자궁은 여자의 사랑을 키우는 곳이다. 자궁이 있어 여자의 사랑은 남자의 사랑보다 넉넉하고 풍요롭다. 자궁은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다. 서른 아홉해 내 삶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왜 너에게만 그런 힘겨운 짐이 지워졌는지 모르겠다'고 늘 안타까워했는데….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게 드리운 어둠으로 인해 삶이 깊어졌노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제, 마흔의 문턱에 선 오늘은 그렇게 내 삶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며 웃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취객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철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진다. 잠시 후 딸깍 문 따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의 쨍알거림이 이어진다. 멀리, 취한 남편과 잔소리를 해대는 아내의 사소한 일상의 다툼이 내게는 정겹게 들려온다. 비로소 남보다 신경이 7배 예민하다는 것이 축복임을 느낀다. 남들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세상의 사소한 모든 것들이 내 자궁 속에서 익어간다. 그것들이 바로 내 시가 된다. 비록 곁엔 없지만 아직도 내 속에서 자라는 내 마음의 여인,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아들 치민 이.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내가 있음을 감사한다. 1998년 여름 박서원 제 1장 세상의 비밀을 너무 일찍 알아 버린 아이 텅빈 유년의 뜨락 4월. 어딜 가든 희디흰 목련꽃에 눈이 부시던 봄날. 아버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목련꽃은 혼자만 희디희게 피어 햇빛을 받는 게 서러웠던지 어머니에게도 흰옷을 입히고 흰나비 핀을 꽂게 만들었다. 목련은 가끔씩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쟁쟁쟁 빛이 가득한 대낮, 통곡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내가 안 것은 다시는 아빠의 따스한 품에 안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골목 어귀에서부터 내 이름을 부르며 귀가하던 아빠의 목소리를 봄바람이 삼켜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내 나이 여덟 살 되던 해. 나는 자꾸 어지러웠다. 흰 나비꽃잎들이 어지러이 바람결에 둥둥 떠다니다가 숟가락으로 변해 내 눈을 찔렀다. 아빠가 먹던 숟가락으로 내가 밥을 먹으려고 하면 화를 내며 숟가락을 뺏던 어머니. 잦은 기침과 깡통에 뱉어내던 검붉은 피, 알약들, 아버지는 자신의 숟가락을 가지고 영원히 가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식솔들이 밥 퍼먹는 숟가락까지 거두어들였다. 밀린 방세와 전당표 다섯장. 몇 날이고 소복 을 입고 통곡하는 어머니와 개구쟁이 두 동생 사이에서 여덟 살의 나는 그저 침묵으로 남겨 져 있었다. 아버지는 해병대 5기생 최연소 장교였다. 19살에 소위를 달고 소령으로 제대했다. 독서광이었던 아버지는 문학을 사랑했으며 군대시절 등단한 시인이기도 했다. 시적 재능에 한계를 느낀 아버지는 군에서 제대 후 부동액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는 부동액을 전부 수입해 사용했다. 아버지는 이런 실정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몸을 돌보지 않고 일했다. 원자재는 수입할 수밖에 없지만 완제품은 우리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발명특허 인가를 받아 자신이 만든 부동액이 전국으로 납품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세운 부동액 회사는 큰아버지의 수중에 들어갔다. "제수씨. 제가 살면 혼자 살겠습니까." 우리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어머니는 회사 인계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아버지를 화장하고 절에 이름을 올리면서 몇 날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울던 어머니는 올망졸망한 삼남매 때문에 더 이상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밀린 방세에 떠밀려 우리 가족은 큰아버지 네로 이사가게 됐다. 우리가 머물 방이 준비돼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을 풀어야 할 곳은 식모 방이었다. 좁은 방에서 식모언니까지 다섯 명이 복작거리며 살아야 했다. 큰 동생은 다섯 살, 막내는 세 살, 아무 것도 모르는 나이지만 초등학교 1학년생인 나는 당시 알 만한 것은 다 아는, 아니 다 알면 서도 모르는 척 눈감을 줄 아는 조숙한 아이였다. 어른들의 거짓말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대 해서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세상의 비밀을 너무 일찍 알아 버린 비애, 애당초 마법의 성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린 어린 소녀의 절망이었다. 큰아버지 집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한번도 큰아버지네 가족과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식모 방에서 밥을 먹어야 했고 우리 가족을 싫어하는 큰어머니 눈치를 살펴야 했다. 큰아버지는 막내딸은 나 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노골적으로 우리를 무시했다. 나는 아침에 세수를 할 때도 이를 닦을 때도 그 애 눈치를 살펴야 했다. 대야, 칫솔, 머리빗, 빨래 등 우 리 가족의 물건은 하인의 물건이었고 내 동생들이 자기네 물건을 쓰면 큰일나는 날이었다. "우리 물건 만지지 마. 더러워져." 마음 같아선 그 애를 할퀴고 물어뜯고 싶었다. 큰아버지에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만약, 어머니가 참아야 된다고. 그래도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다고 타이르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었다. 큰아버지네 가 빨래를 거둬들인 뒤에야 눈치를 보며 몰래 우리 빨래를 너는 어머니의 모습은 측은했다. 비가 와서 급히 빨래를 걷어들여야 할 때면 우리가 기거하는 방 가득 빨래를 널었다. 그러면 방은 더욱 컴컴해지고 몇 천년의 고드름이 천장에서 녹아 내린 동굴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몸이 약해져서 돈암동에서 낙원 동에 있는 교동 초등학교까지 등교하는 일도 벅찼다. 얼굴에 노란 꽃이 피었다. 하지만 내게도 위안은 있었다. 큰아버지네 골방엔 굴러다니는 동화책이 많았다. 나는 먼지투성이인 골방에 몰래 들어가 몇 시간이고 동화책을 읽었다. 쌓인 먼지를 걸레로 닦아내면 한 글자 한 글자 내 눈에 들어오는 세계는 꿈과 같았다. 바다와 하늘과 너른 들판으로 날개를 달고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새처럼 나는 자유로웠다. 글자 속에서 나는 원하는 대로 바뀌는 내 모습을 즐겼다. 안데르센은 나의 우상이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굴뚝 옆에서 죽어갔을 때 나는 골방 창으로 흘러드는 햇빛을 바라보며 두 시간이나 울었다. 동화책은 내 어린 시절을 위로해 주었다. 동화책을 익는 동안은 잠시 불행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몹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마루에선 선풍기가 윙윙 돌아가고 있었다. 집안엔 동생과 뒤뜰청소를 하는 어머니뿐이었다. 식모도 시장 가고 없었다. 막냇동생이 젓가락을 가지고 놀다가 눈 깜빡 할 새에 선풍기 안으로 넣고 말았다. 드드득 선풍기 날개는 파편이 돼 사방으로 튀었다. 막내 동생은 너무 놀란 나머지 울지도 못했다. "엄마 !" 당황한 나는 소리를 질렀다. 큰아버지네 선풍기가 망가져버린 것이었다. 어머니가 달려왔다. 선풍기 코드를 빼고 어머니는 빗자루로 사방에 흩어진 선풍기 날개 파편을 쓰레받기에 주워 담았다. 그리고선 뼈대만 남은 선풍기를 들고 나갔다. 얼마 후 선풍기는 새것이 돼서 돌아왔다. 그렇지만 색깔이 바뀐 것을 큰어머니가 눈치챌 텐데…. 깊은 밤이 됐다. 방은 눅눅하고 비좁았다. "엄마, 자 ?" "왜 ?" "우리 아직도 이사 못 가 ?" "아니, 이사 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 "이번 주 토요일."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로 가 ?" "그래." "그럼 이제 학교 안 빼먹고 갈 수 있겠네." "좋으냐 ?" "선풍기 때문에 이사가게 된 거지 ?" "한집에서 살기가 쉽지는 않구나." 어머니는 돌아누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우리 가족만 살 수 있게 됐네." 나는 그 날밤 이사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부풀어 잠이 오지 않았다. 미운 오리새끼는 어디로 가야 하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토요일이 왔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이삿짐을 짐칸에 다 싣고 우리 가족은 운전석 옆좌석에 모두 앉았다. 막내 동생은 어머니가 안았고 다음 큰 동생, 문 옆에 는 내가 앉았다. 차가 혜화동을 벗어날 때쯤부터 어머니 얼굴에 그늘이 졌다. "서원아. 엄마 말 잘 들어. 넌 당분간 외할머니 집에서 살아야 돼." "왜 !" 나는 묻는다기보다 소리치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나를 귀여워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 동물이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듯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차 유리창으로 즐겁게 넘실대던 진초록의 여름 풍경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인집에서 애가 많으면 방을 안 주려고 해. 그래서 자식이 둘이라고 했단다. 네가 제일 큰누나니까 양보해야지." 나는 외할머니가 구박할 거라는 말을 꾹 참았다. "토요일마다 와서 자고 가면 되잖니. 대신 엄마라고 부르면 안돼. 이모라고 불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영 천상에서 쫓겨난 새. 그 새는 날개가 아닌, 가느다란 두 다리로 지상을 걸어야 한다. 어디까지 걸으면 날개를 되찾을 수 있을까.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해서 코가 길게 늘어 나는 벌을 받았다. 나는 무슨 벌받을 짓을 했나? 한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셋방. 여기 저기 놓은 짐들 사이에서 나는 훌쩍 훌쩍 울었다. 동생들과 엄마와 함께 살고 싶었다. 내 반친구들은 모두 그렇게 사는데, 아빠도 있는데, 나는 있는 것마저 없 는 것처럼 하고 살아야 된다니…, 오래 슬퍼할 새도 없이 나는 어머니 손에 끌려 내 보따리와 책가방을 들고 외할머니 집으로 갔다. 한 블록쯤 되는 거리였다. 가끔씩 놀러올 땐 낯설지 않던 외할머니 집이 내가 살아야 될 집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하게 낯설었다. 외할머니의 무서운 눈초리가 나를 더욱 주눅들게 했다. 외할머니네 는 골방도 없었다. 몰래 숨어서일지언정 동화책을 읽을 수 있는 내 조그맣고 비밀스러운 공간이…. 그 공간은 푸른 잔디가 깔린, 너른 들판이었고 아빠품 같은 미풍이었으며 반짝 반짝 빛나는 날개를 가진 천사들의 나라였다. 아빠하고 나하고 / 만든 꽃밭에 / 채송화도 봉숭아도 / 피었습니다 / 아빠가 매어놓은 / 새끼줄 따라 / 나팔꽃도 어울리게 / 피었습니다. 나는 이상한 아이였나 보다. 어머니가 가고 나서 대문밖에 앉아 나뭇가지를 주워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중얼거렸다. 그 노래만 부르면 외로움이 가시고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따스함이 고여들곤 했다. 다리에 쥐가 나서 마비가 돼도 나는 몇 시간이고 한자리에 붙박여 일어나지 않았다. 밤에 잠을 자는데 누군가가 자꾸 발길질을 해댔다. 사촌 여동생이 잠버릇이 고약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날 밤 나는 윗목 장롱이 놓인 쪽, 사촌 여동생은 아랫목, 외할머니가 가운데에 누워 잠이 들었다. 또 발길질에 잠에서 깼다. "에그. 좁아서 죽겠네." 외할머니의 불평하는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외할머니는 자꾸 내 엉덩이를 발로 걷어 찼다. 나는 손발을 오그리면서 장롱으로 밀려갔다. 더는 갈 곳이 없어요, 하느님.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창호지가 발린 창으로 새어들어 오는 달빛은 자개장롱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낮에 본 자개장롱은 그토록 화려하고 아름다웠는데 달빛에 반사되는 자개 무늬는 아가리 디민 공룡 같았다. 나는 무서워서 다리를 오그린 채 양팔을 두근거리는 가슴에 모았다. 그렇게 가슴 졸이다 할머니가 일어나고 난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다. 학교에 가서 수업 도중 자꾸 졸았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도 졸음이 쏟아졌다. 따르릉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뭘 배웠는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매일 외할머니 발길질에 시달리면서 선잠을 잤고 동이 트기만 간절히 기다렸다. 그리고 낮시간엔 학교에서 졸음과 싸워야 했다. 고통이었다. 나는 공부하고 싶었다. 토요일마다 내 베개를 안고 어머니에게 갔다. 보고싶던 동생들과 이불 쌓아 놓고 장난도 하고 씨름도 했다. 어머니가, 외할머니가 네게 잘해 주시니? 물을까 겁났지만 다행히 어머니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가을이 왔다. 웬만큼 적응이 된 건지 외할머니의 발길일 뜸해졌다. 큰외삼촌이 동화책을 사줘서 다시 책도 읽을 수 있었다. 찌르찌르와 미찌르가 나오는 <파랑새>도 있었고 과자로 만든 집의 <헨델과 그 레텔>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위인전도 있었다. 나는 퀴리 부인과 헬 렌 켈러를 좋아했다. 헬렌 켈러는 내 영혼을 차지했다. 내 운명이 헬렌 켈러처럼 도리 것을 알았던 것일까? 맹렬하고 사나웠던, 장님에 귀머거리 여자를 나는 첫날부터 사랑했다. 천형 같은 운명을 극복하고 자신을 성취한 헬렌 켈러. 나는 수줍은 어린 소녀에서 조금씩 헬렌 켈러 같은 사나운 아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촌 여동생이나 사촌오빠는 동화책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내 차지가 됐다. 골방은 없었지만 집이 빌 때가 많아 내 도서실은 수시로 마련되는 셈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큰외삼촌이 사촌들과 나를 데리고 문화극장에 갔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60년대 말엔 낙원 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극장이었다. 상영 중인 영화는 <전설 따라 삼천리 >였다. 변소 밑에서 귀신 손이 올라와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한다는 귀신 얘기가 퍼져 변소간 때마다 공포를 자아내던 깊은 가을날이었다. <전설 따라 삼천리>는 어린 내겐 너무나 무서웠다. 해골과 피 흘리는 소복귀신, 색동저고리 입은 귀신, 지네귀신, 무서운 모습들은 죄다 쏟아져 나왔다. 그날 나는 너무 무서워서 외할머니 방에서 자지 않고 큰삼촌과 잤다. 둘이 자기엔 넓은 방이었다. 큰외삼촌은 윗목, 나는 아랫목 끝에 누웠는데 가운데 공간이 달빛을 받아 휑뎅그렁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영화에서 본 무서운 귀신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벽을 보고 돌아누우면 가운데 빈 공간에 귀신이 서 있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뒤를 돌아보면 큰삼촌이 누워 있고 귀신은 없었다. 나는 자꾸만 뒤척였다. 내 뒤척이는 소리에 깬 큰삼촌은 "내일 학교 안 가느냐"며 화를 벌컥 냈다. 나는 더 무서워졌다. 엄마, 무서워. 엄마, 무서워. 나 데리고 가. 마음속으로 아무리 외쳐도 멀리 있는 어머니가 알 리 없었다. 불행한 환경 속에서 본 공포의 귀신 영화는 악몽과 환상으로 내 삶의 한 부분을 지배하게 된다. 한이 쌓이면 허한 가슴은 헛것을 보게 되는 것일까. 그날의 두려움은 며칠 지나 사라졌지만. 사실은 사라진 게 아니라 허한 내 가슴으로 스며들어 어린, 내 상처 입은 영혼과 뒤범벅되면서 기이한 환상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11월 중순. 김장철이었다. 마당 가득 배추가 쌓여 있고 시퍼런 줄기가 달린 무도 많았다. 마당에 들어서면 배추 풋내가 코를 찔렀다. 밖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다가 들어온 나는 몹시 목이 말랐다. 옷이 없어서 하얀 스타킹에 가을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춥지는 않았다. 동네 애들과 어떻게나 뛰었던지 등에 땀이 배어 있었다. 나는 수도꼭지에 끼워진 호스를 빼고 물을 마셨다. 너무나 달고 시원했다. 다시 호스를 수도꼭지에 끼려 했지만 물기로 얼어붙어 잘 끼워지지 않았다. 나는 수돗가에 고무호스를 내버려두고 밖에 나가서 더 놀다 들어왔다. 마당에 들어서다 새들어 사는 성길 이 어머니가 배추를 절이고 있었다. "서원이년 들어왔어 ?" 외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부엌에서 뛰쳐나왔다. 두 눈이 미움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수도꼭지에 끼려다 실패한 돌덩이 같은 고무호스로 가늘디가는 내 다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마냥 매를 맞고 있었다. 성길 이 어머니가 말렸지만 외할머니는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며 계속 때렸다. 문간방에 사는 새댁이 와서 또 말렸다. "웬수년 ! 이년 ! 지 아버지 잡아먹은 년 !" 외할머니는 고무호스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어린애가 물을 꼭 못 잠글 수도 있지. 그랬다고 이렇게 때려요 ?" 성길 이 어머니가 쯧쯧 혀를 찼다. 하얀 색 스타킹에 붉은 피가 물들어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딸의 새 출발을 막는 새끼인 나는 '애물단지'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난 아들도 아니고 딸이었다. 불쌍한 외할머니. 외할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던가. 사촌 여동생은 장남의 딸이라서 그런지 끔찍이 귀여워해 사탕이나 과자를 나 몰래 주곤 했던 외할머니. 그러나 그런 것은 부럽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사촌 여동생이 가진 사치스러운 옷이나 외제 인형 따위도 부럽지 않았다. 나의 소원은 밤에 편히 잘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난 참 지독한 아이였나 보다. 그렇게 억울하게 매를 맞으면서도 울지 않았다. 토요일이 돼 여느 때처럼 내 베개를 들고 어머니에게 갔다. 예쁜 막냇동생을 껴안아보고 큰 동생과 옛날 얘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궁이에 걸터앉아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그리웠던 엄마 곁으로 쪼르르 달려나갔다. "엄마. 나 여기서 살면 안 돼 ?" 큰소리로 불쑥 말을 꺼내놓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차 ! 엄마라고 하면 안 되는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뒤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왜 이모를 엄마라고 부르니 ?" 쏘아붙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매를 맞을 각오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눈물만 흘리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나서 어머니는 내 종아리를 보자고 했다. 나는 너무 놀랐다. 외할머니에게 맞았다는 말을 입밖에 꺼낸 적도, 내색을 한 적도 없었다. 나는 이상하리 만치 말을 안 하는 아이였었다. 동네가 좁아 소문이 퍼졌거나, 아니면 평소 친한 성길 이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엄마. 이 집에서 또 쫓겨나 ?" 나는 외할머니에게 맞은 것보다 엄마를 이모라 하지 않고 엄마라 불러서 쫓겨나는 게 아닌지, 오직 그게 걱정이었다.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울기만 했다. 일요일 저녁이 됐다. 나는 내 베개를 안고 외할머니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냥 자거라. 책가방은 엄마가 챙겨오마." "나, 여기서 살아도 돼 ?"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주인 아줌마가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얼른 너를 데려올 수가 없더구나." "나가라 그러는 건 아니겠지, 엄마 ?" "그래. 이젠 엄마라고 불러도 돼." 어머니는 외할머니 집에서 내 짐을 가지고 한밤에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또 잠이 안 왔다. 엄마와 동생들과 살게 되다니. 창호지 문으로 스며든 보름달빛이 그간의 어두웠던 내 밤을 휘영청 밝게 비춰 주었다. 어린 딸에게도 아빠의 병이… 어린 시절, 이사가는 날은 신이 난다. 자연의 힘에 밀려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모양과 자리를 바꾸는 구름처럼 떠돌아 다녀야 하는 자의 슬픔을 알 리가 없다. 여기 저기 처박혀 있던 낡은 물건들이 하나 둘씩 어머니 손에 이끌려 나올 때마다 우리 삼남 매는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 된다. 이사가려고 묶어 층층이 쌓아둔 짐들 사이에서 아이들은 얼마나 즐거운 가. 미로의 성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재미 이상이다. 이사간 집은 햇빛이 잘 드는 마당 한 쪽의 햇빛이 잘 드는 방이었다. 아득한 기억 저편에 서 막냇동생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머니가 나갈 적마다 울어대는 막내를 어떻게 울리지 않고 어머니에게서 떨어지게 하나. 요술을 부리듯 막내의 얼을 빼 얌전한 아이로 데리고 노는 것이 우리 남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우리는 막내를 구멍가게로 유인해 과자를 고르게 했다. 어머니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막내는 어머니를 찾느라고 두리번거렸지만 나와 큰 동생은 이건 어떠니, 말을 붙여서 정신없게 만들었다. 막내는 잠시 어머니를 잊고 이것 저것 과자나 장난감을 구경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고 막내 몰래 어머니에게 신호를 보냈다. 어머니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막내를 어머니에게서 떼어놓는 작전은 내 기억에 아마도 1년쯤 계속된 것 같다. 저녁이면 동네 아이들과 놀았다. 술래잡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놀이가 끝나고 지칠 즈음이면 어스름이 오고 아이들은 유령놀이를 했다. 술래는 흰 쌀부대를 뒤집어쓰고 아기가 빠져죽었다는 폐쇄된 변소 가까이 가야 하는 벌을 받았다. 알 수 없는 한문을 크게 써 붙인 나무 대문은 막다른 골목에 있었는데 어린 내 눈에 그곳은 유독 어둠이 빨리 내리는 것 같았다. 아기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굿판이 벌어졌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구경을 하기에 나도 사람들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요란스러운 징 소리, 노랫가락,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울긋불긋 단풍 같은 옷을 입고 무당은 춤을 추었다. 굿이 막판에 이르렀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갈 무렵 무당이 던진 계란이 하필 막 뒤돌아서 가려는 내 머리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나는 노른자와 흰자가 엉겨 붙어 양수에서 갓 나온 아기 꼴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델 왜 가 !" 하필 어머니가 일찍 들어온 날이었다. 9월 초. 낮에는 덥지만 저녁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물을 데워 머리를 감고 목까지 흘러내린 계란을 닦아냈으나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액땜을 하는 계란을 맞았다고 두고두고 야단을 쳤다. 나는 왠지 불안했다. 밤에 잠이 안 왔다. 벌써 귀뚜라미가 울어댔다. 나는 재수 없는 아이가 됐다 고 생각했다. 새학기였다. 교문 앞에서 아기 손바닥만한 동화책을 팔고 있었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같은 예쁜 공주 그림이 담긴 동화책밖에 없었다. 소공녀나 프란다스의 개, 시골 쥐와 서울쥐 같은 동화책은 없었다. 불만스럽긴 했지만 아저씨한테 얼마냐고 물었다. 1원! 1원! 아저씨는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거리를 향해 외쳤다. 나는 1원을 주고 호박이 멋진 마차가 되는 그림이 있는 신데렐라를 샀다. 처음 가진 내 동화책이었다. 이미 여러 번 읽었던 내용이지만 내 책을 갖고 싶었다. 나는 신이 나서 춤을 추듯 집까지 빨리 걸어왔다. 숨이 차서 그러는지 조금씩 나던 기침이 몹시 심해졌다. "엄마, 집에 있었어 ?" 어머니는 야채튀김을 하는 중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집에 있는 어머니를 보고 함박꽃처럼 웃었을 내가 슬며시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앓는 소리를 내자 어머니는 "왜 그러니? 어디가 아파 ?"하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기침을 몹시 했다. 어머니는 방에 들어와 내 이마를 짚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애가…" 중얼거리다가 뭔가 집히는 게 있었던지 "병원에 가자"고 서둘렀다. 큰 동생이 막내 손을 잡고 어머니는 나를 부축해 신호등을 건넜다. 동네 내과 병원으로 들어갔다. 한 달이 넘게 병원을 다녀도 기침이 멎지 않았다. 나는 기침 때문에 가슴이 아파 잠들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병원 의사에게 따졌다. 그제야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보자고 말했다. 폐결핵이었다. 아버지가 저 세상에 가던 날 이후 그렇게 절망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의사가 큰 병원에 가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집에 돌아와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있었다. 한참 후 잠에서 깨어난 듯 어머니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평소 어머니 같지 않아 왠지 두려웠다. "어디가? 엄마…." "큰집 다녀올게…." 큰집에 도움을 청하기는 처음이었다. 병든 나 때문에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내팽개친 것이다. 수없이 엑스레이를 찍는 동안 가뜩이나 말라깽이였던 나는 더욱 말라갔다. 한 움큼씩, 강제로 회충약을 먹을 때처럼 잘 안 넘어가는 알약들을 삼켰다. 먹은 약을 토하기도 했고 수시로 열이 올랐다.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3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폐결핵 3기까지 갔던 몸이 많이 회복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나 때문에 직장을 자주 빠져서 잘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다방 마담도 직업은 직업이었다. 먹고사는 게 중요하긴 했지만 다방 마담의 자식이라고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면서도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인 나는 어머니가 직장을 잃으면 어떡하나 염려하는 것이었다. 돈 한푼 없는 데다 어린 자식이 셋이나 딸린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자를 상대하는 것뿐일까 하는 점이 그 시절 나의 궁금증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학교에 오면 반친구들은 영화배우 왔다고 수군거렸다. 나 는 싸구려 한복을 입어도 곱기만 한 어머니가 싫었다. 어머니가 배추장수나 생선장수처럼 몸뻬를 입고 비린내가 나는 더러운 앞치마를 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머니를 부정하면서도 영악한 나는 어렴풋이 나마 그럴 수밖에 없는 어머니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수업 중에도 창밖을 보며 여자의 삶을 생각하곤 했다. 난 절대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난 열심히 공부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폐결핵 약을 끊은 날 나는 내 의지의 끈을 단단히 묶었다. 이문동의 가난한 3남매 이문 동에 피어있는 풀이나 꽃은 모두 검다. 이문동의 모든 물건은 제 색깔을 내지 못한 다. 연탄공장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70년대 초, 이문 동에는 연탄공장이 많았다. 품질 이 제일이라던 삼천리표 연탄을 위시한 연탄공장들이 철둑과 철길을 사이사이에 두고 여러 곳에 있었다. 그곳에 쌓인 석탄가루는 바람에 실려 정원의 연못에도 엷은 막을 치고 깨끗이 빨아 넌 빨래에도, 장독대에도 날아들어 일상생활 곳곳에 자리잡았다. 창문을 열어두면 검은 석탄가루는 방안까지 차지해 공기와 뒤섞여 기관지를 오염시켰다. 그래서 이문 동은 집값이 쌌다. 외할머니네 가 종로에게 이문 동으로 이사를 갔다. 철길 가까이 자리잡았다는 것은 살림이 기울고 있다는 불길한 징조였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그 집으로 이사를 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지 두말 않고 짐을 꾸렸다. 외할머니네 는 방이 많았고 그 중 한 곳에 세를 들었다. 아주 큰 정원은 아니었지만 회양목이 20그루 정도 있었고 연못에는 빨간 금붕어가 여러 마리 꼬리를 흔들며 놀고 있었다. 안방은 큰외삼촌이 사용했는데 안주인인 외숙모는 그곳에 없었다. 무용수였던 외숙모는 외국으로 공연을 다니는 화려하고 세련된 여자였다. 집에서 살림만 꾸리는 일은 절대 못한다며 외삼촌과 크게 싸우고 떠난 지 4년. 외숙모는 외국을 전전하며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외국에서 보내온 옷이나 샌들, 인형들은 국내에서 볼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었지만 차츰 선물도 편지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큰외삼촌은 유명한 드러머였고 당시 방송국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고급 커튼이 처친 안방엔 전화와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는데 방송국 일이 끝나고 나이트클럽 같은 업소에서 일하던 큰외삼촌은 아침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래서 큰삼촌이 없는 시간, 방송이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전화나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드물었다. 내가 동생들에게 눈치를 주고 단속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 가족이 외할머니네 와 함께 살면서부터였다. 심통 사납던 사촌 여동생이 어느 날부턴가 우리 삼남 매가 가면 텔레비전을 끄거나 나가라고 했다. 동생들은 텔레비전이라면 밥을 먹다가도 달려갔지만 나는 웬일인지 그다지 흥미가 생기질 않았다. 책읽기나 글쓰기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던 탓인지 모른다. 아무튼 나는 못되게 구는 사촌 여동생과 싸우지는 않았다. 그 애 말대로 '그 집 텔레비전'인 것이었다. 사촌 여동생이 "우리 텔레비전이야"라고 외치면서 화면을 떡 가리고 서면,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동생들은 TV를 보고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고 늦게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안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촌 여동생과 큰 동생의 목소리였다. 나는 책가방을 든 채 안방으로 달려가 큰 동생을 끌 고 나왔다. 형이 나오자 막내도 줄레줄레 따라나왔다. "텔레비전 보러 가지 말라고 했잖아 !" 우리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총채를 들고 큰 동생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큰 동생 을 내가 때린 것은 처음이었다. "다신 안 갈게. 누나, 잘못했어." 막내는 잔뜩 겁에 질려서 구석에 있었다. "넌 치사하지도 않니 ?" 너무 분해서 때리는 손이 멈춰지질 않았다. 큰 동생은 아파서 펄쩍 펄쩍 뛰었다. 7살배기 가 무얼 알겠는가. 나는 미어져오는 가슴을 참지 못해 휘두르던 총채를 집어던졌다. 큰 동생 과 막내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눈을 치떠도 눈물이 흘렀다. "누나하고 놀자. 재미있는 얘기해줄게." 나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얘기를 해주었다. "그럼 동굴 속의 보물을 다 가져갔겠네." "물론이지. 그 다음 얘기는 더 재미있단다." 큰 동생은 나에게 매맞은 기억을 금세 잊어버렸다. 막내는 눈만 끔뻑거렸다. 얘기를 끝내 고 저녁을 먹은 후 동생들은 또 심심해했다. 우리는 이불과 베개를 쌓아 성을 만들었다. 큰 동생은 양은냄비를 머리에 쓰고 막내는 보자기를 어깨에 둘렀다. 우리는 병정놀이를 했 다. 우주소년 아톰도 되고 별을 단 장군도 됐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어떻게 걷는 줄 아니 ?" 나는 배를 쑥 내밀고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거위처럼 뒤뚱거렸다. 큰 동생은 벌거벗은 임금님 얘기를 알고 있었다. 큰 동생이 낄낄거리며 웃자 영문도 모르는 막내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엔 앙금처럼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쌓여 버석거리고 있었다. 큰외삼촌의 딸인 사촌 여동생은 막내였다. 그래서 오냐 온갖 투정을 다 받아줄 뿐 나쁜 버릇을 아무도 고쳐주지 않았다. 내 동생들을 구박해도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어른들이 더 나빴다. 고기가 귀하던 그 시절, 큰외삼촌은 자주 통닭을 사들고 들어왔다. 우리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으면 너희 방에 들어가 놀라고 했다. 우리는 고소한 통닭 냄새를 뒤에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늘 배고파했던 막내는 안채를 기웃거렸다. 내가 일 기를 쓰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막내가 보이지 않았다. "막내 어디 갔니 ?" "밖에 나갔어." 막내는 안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안에서 외할머니 가족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막내를 조용히 끌고 들어왔다. "거지나 그런 짓 하는 거야." 동생들에 대한 단속은 몇 년 동안 계속됐다. 친척집에 가서 밥을 먹을 경우나 과자를 먹을 경우 나는 조금만 먹으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워낙 의젓하고 어른스러웠던 큰 동생 은 알아서 잘 해주었으나 먹보인 막내는 늘 내 눈치를 살폈다. "많이 먹으면 가난한 집 아이들이라고 무시해." 나는 단호했다. 친척이 더 권한다고 해서 더 먹었을 경우엔 집에 돌아온 후 반드시 혼을 냈다. 대신 나는 어머니가 맛있는 것을 사오면 먹지 않았다. 내가 먹으면 동생들 몫이 줄어 드는 것이다. 며칠 후 나는 어머니에게 이사가자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사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사하느냐고 그랬다. 내가 유별난 아이라며 야단을 쳤다. 나는 까닭을 말하지 않았다. 조목조목 얘기해도 됐을 텐데, 내 입은 엿을 발라놓은 것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나날이 흘러갔다. 외할머니가 쓰러졌다. 외할머니를 병원으로 옮기고 집안은 술렁 거렸다. "너 때문이야." 나보다 두 살 어린 사촌 여동생은 나한테 언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왜 내 탓이니 ?" 초가을. 가벼운 바람이 살랑 였다. "다락 청소를 요란하게 했잖아." 그랬다. 외할머니가 다락 청소를 시켰는데 빗질하는 소리가 크다고 몇 번이나 야단을 맞았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저녁밥을 안쳐놓고 혈압으로 쓰러졌다. "지아비를 잡아먹은 년" 이라고 나를 구박했던 외할머니. 내 탓이라니. 천만에 ! 외할머니가 식물인간이 돼 돌아온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하느님이 내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억누르고 억눌렀던 분노가 기쁨으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일순간 내 자신이 무서워졌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내 저주가 이루어지다니. 외할머니는 입이 비뚤어져 말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막내 외삼촌이 똥과 오줌을 받아냈다. 막내 외삼촌은 직장도 결혼도 포기하고 외할머니 병시중을 들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는 내 자신이 두려워졌다. 그 사람들 모두 벼락을 맞으면 어떻게 하나. 동화 속 마녀처럼 심통과 저주로 사람을 돼지나 소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머리털이 쭈뼛거렸다. 정말 내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점점 내가 무서워졌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 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애써 그 미움을 가라앉히곤 했다. 외할머니가 누워 있는 동안 청소며 설거지며, 그 많은 집안일 은 내 몫이 됐다. 나는 식모처럼 일했다. 그러면 외할머니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내 죄가 씻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떤 때는 또 독사처럼 앙큼하고 당찬 생각이나를 휘어잡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했어. 날 못살게 구는 사람은 절대 성치 못할 거야. 내 마음의 무언가가 칼날에 저며지는 것 같았다. 1년쯤 지나 외할머니는 회복이 되긴 했으나 반신불수였다.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는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 드러머였던 큰외삼촌이 통기타 세대에 밀려 직장을 잃었을 즈음 외숙모는 잘 사는 필리핀 남자와 결혼해 필리핀에 정착했다. 이 소식을 들은 큰외삼촌은 신경안정제 아티반 중독자가 돼 폐인이 돼 갔고 반신불수의 어머니를 괴롭혔다. 외할머니네 집안은 몰락하고 아들의 괄시와 구박으로 매일 울며 지내던 가엾은 외할머니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나는 어른이 돼서야 외할머니가 살아온 기구한 삶을 이해하게 됐다. 외할머니 역시 아버지 없이 자랐다. 증조 할머니도 남편을 일찍 여읜 것이었다. 외가 쪽은 3대째 남자 없이 집안을 꾸려온 서글픈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훗날 그들의 삶의 궤적을 통해 여인들의 기구한 운명과 살아가기 위한 투쟁, 그 눈물을 알게 됐다. 지금처럼 여자들이 마음대로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던 시절, 외 증조모, 외할머니,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몸과 마음을 세상에 내던져야만 했다. 남자들이 차지한 세상에서 남편 없는 삶이란 전쟁과도 같은 것이었다. 엄마, 엄마, 파랑새는 어디에 고혈압으로 쓰러진 외할머니가 식물인간이 돼 돌아온 한 달쯤 후 우리는 이사를 했다. 어머니가 안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다. 나는 찬물에 빨래며 설거지를 하고 동생들이 아무렇게나 잠들어 있으면 이불을 덮어주었다. 겨울이 오고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시간 맞춰 연탄을 가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때는 연탄이 최고의 연료였다. 연탄가스 냄새를 맡으면 어지러웠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밑연탄과 불씨가 있는 윗연탄이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경우였다. 붙은 연탄을 떼어내려다 연탄이 떨어져 조각이 나곤 했다. 나는 부서진 연탄재 앞에 앉아 울었다. 연탄과 씨름하다 자정이 넘은 시간. 울어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내 속에서 나를 다독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숯을 찾았다. 밑연탄을 아궁이에 넣고 불씨가 남은 연탄조각들을 그 위에 얹은 다음 숯을 놓았다. 아궁이 공기 구멍에 대고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불꽃이 피어올랐다. 활활 타는 숯 위에 새 연탄을 얹었다. "살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방이 식지는 않았겠지. 동생들이 추우면 안 되니까. 엄마가 들어 왔을 때도 방이 따스해야 해. 부엌 바닥에 깔린 연탄재를 청소하고 방에 들어왔다. 새벽 두 시였다. 동생들은 이불을 걷어차고 김을 뿜는 주전자 뚜껑 같은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 있었다. 발 밑에 깔린 이불을 빼내 다시 덮어주고 나도 누웠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양말 가득 선물을 준다는 산타클로스를 믿기엔 이미 너무 커버린 나이. 엄마는 어디에 계실까 ? 지난번 버스정류장에서 어떤 아저씨와 함께 서 있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잠이 오지 않았다. 도시락이 식을까봐 파란색 작은 방석을 만들어 보자기에 싸주던 어머니. 그래서 내 도시락은 다른 아이들 것보다 유난히 컸다.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이 깊은 밤 우리를 버리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했으나 자기 삶의 방식이 예민한 딸에게 상처를 주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사는데 만 급급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다 부엌에 나가 연탄불이 제대로 붙었는지 살펴보았다. 연탄 구멍 사이로 불꽃이 솟아올라 있었다. 나는 아궁이 공기 구멍을 똘똘 만 신문지로 막고 방으로 들어왔다. 새벽 네시였다. 시계바늘이 심장에 박힌 듯 가슴이 쿵쾅거렸다. 마당에 쌓아 놓은 비닐이 바람에 요란스레 바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며 자꾸 시계를 보았다. 동생들은 이불을 걷어차고 나는 또 덮어주고. 어느새 긴긴 겨울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만일 네가 봤다면 불붙는다 했겠지, 노래를 나지막이 불러보았지만 뛰는 가슴은 어쩔 수 없었다. 검푸른 색깔의 겨울 새벽, 이윽고 어머니가 열쇠로 대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머니의 새벽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앉아서 소리를 죽이며 울었다.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찌르찌르와 미찌르야. 파랑새는 어디 있는 거니. 그래도 어머니가 돌아온 안도감에서일까. 무거운 내 눈꺼풀이 진짜 감겨지고 있었다. 엄마의 남자 키가 작고 빗물이라도 받을 것처럼 턱이 약간 들린 그 남자가 단칸방. 우리 집에서 살게 된단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그림 속 아이에게 말했다. 하얀 케이크를 들고 가끔씩 우리 집 을 방문하던 그는 처음엔 어머니의 다른 남자들처럼 안개 저편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양손에 가방을 들고 대문을 들어서는 그 남자를 보았을 때 나는 우리 삼남 매의 오두막이 무언가 거센 힘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빠라고 불러야 돼." 어머니의 명령은 메아리처럼 오래 오래 내 귀에 울렸다. 누추했지만 평화로웠던 삼남 매 의 오두막을 부수고 성큼 들어온 낯선 짐승. 어머니의 생활을 두둔하고 이해하려 애써왔던 나는 가장이란 이름으로 들어온 그로 인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새 학기. 4학년이 된 봄. 목련꽃은 동네마다 거리마다 희게 희게 나풀거리며 나를 약올렸다. 우리 삶에 불쑥 끼여든 그 남자는, 우리를 손가락질하던 동네 여자들이나 나를 미워했던 외할머니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들은 어머니를 빼앗아 가지는 않았다. 늘 초조한 기색의 새 아빠. 함께 밥 먹는 것도, 말하는 목소리조차 듣기 싫었다. 학교에서도 새 아빠는 비밀스럽고 부끄러운 존재였다. 아버지 없는 사람 ! 선생님이 호명하면 나는 손을 들었다. 내 손은 가냘프게 떨리며 갈등했다. 집에 아빠, 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건가? 새 어머니도 어머니인 것처럼 새 아빠도 아빠인 것인가 ? 결혼식도 안 올린 사람이 아빠 자격이 있나. 내 가슴이 콩닥 콩닥 뛰었다. 새 아빠 때문에 동네 사람들 눈치를 더 살피게 됐다. "엄마. 나에게 의논했어야지. 난 이제 어린애가 아냐." 눈물 대신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솟아올랐다. 방과 후 교실에 비치 돼 있는 책들을 읽다가 늦게 집에 돌아가는 날이 많아졌다.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것도 기쁘지 않았다. 숙제를 후딱 해놓고 새 아빠가 들어오기 전에 집을 나오곤 했다. "밥 먹어야지. 어딜 가니 ?" 어머니가 물으면 난 배고프지 않다고 말했다.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다. 나는 워낙 잘 먹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서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지 대문을 나서도 어머니는 나를 잡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새 아빠 때문에 그런 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모르는 척 하는 것일까. 교실에 비치된 책들을 다 읽고 나면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내 그림이 늘 교실 뒷벽에 붙어있긴 했지만 미술대회에 나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대회에 나가려면 회비가 필요했다. 미술 대회에 나가 실력을 발휘해보고 싶어도 회비를 낼 돈이 없었다. 있다 해도 새 아빠의 돈은 싫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 혼자 그림을 그리면 그만이었다. 새 아버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느니 상을 포기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새 아버지는 우리를 1년 먹여 살리고 실직했다. 어머니가 다시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새 아버지는 집에서 빈둥거리는 날이 많았다. '불쌍한 엄마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놈.' 그에 대한 내 증오는 극에 달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나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다. 어느 날 밥을 차려주기 싫어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당신이 차려 먹어." "당신 ?" 새 아버지는 어이가 없는지 담배를 피우던 동작을 멈춘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담배를 든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당신이 아빠야 ?" 나는 더 당돌하게 대꾸했다. 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했다. 뺨이 얼얼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새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잡아 흔들었다. 그가 나를 뒤로 넘어뜨렸다. 힘이 모자라는 나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오기가 뻗쳤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개새끼 !" 어린 내 입에서 표독스러운 말이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를 고생시키고 여자에게 얹혀 사는 거머리를 용서할 수 없어. 그는 내 배 위에 앉아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내리눌러 팔을 못 움직이게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내 왼쪽 오른쪽 뺨을 차례로 갈겨댔다. 눈이 튀어나오고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그의 힘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죽여라 ! 죽여 !" 악에 받친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목구멍까지 아팠다.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아이에게 질렸다는 듯 그가 물러났다. 그토록 맞으면서도 악다구니로 덤벼들고 소리치는 나를 그 불쌍한 남자가 어쩔 수 있었겠는가. 새 아버지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귀에서 윙 소리가 나고 머리가 아팠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아 그를 노려보았다. 말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그는 나가버렸다. 거울을 보니 뺨이 부어 복어 배처럼 불룩했다. 새 아버지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영원히 가버렸으면. 나는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는 되돌아왔다. 눈이 마주쳤으나 나는 모른 척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한방에서 지냈다. 늘 집에서 빈둥거리던 새 아버지가 다음날도 외출을 했다.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차츰 새 아버지의 외출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하루 저녁 들어오면 3일은 외박을 했다. 그 무렵 학교에서 자료실 청소당번이 됐다. 네 명이 한 조였다. 자료실은 교실 두 칸을 사용하고 있었다. "빗자루 어딨니?" 같이 당번이 된 친구들이 빗자루와 쓰레받기, 물걸레를 찾았다. "저쪽 교실에 있나봐. 내가 가볼게" 창 밖 하늘로 막 노을이 피어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과학재료들을 쌓아두고 평소에는 잘 드나들지 않는 옆 칸으로 갔다. 문을 여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해골이었다. 가느다란 팔, 다리, 발가락, 손가락뼈들. 귀신영화에 나오는 해골이나를 보고 있었다. 머리칼이 곤두섰다. 뒷걸음쳐 나오고 싶었으나 빗자루를 못 가져가서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살금살금 들어가 도둑질을 하듯 청소 도구들을 가지고 나왔다. 친구들과 함께 그 교실로 다시 가 해골을 보았을 때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모조지만 징그럽다, 얘." 친구들도 모조해골이 징그러웠는지 그 근처는 청소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밤마다 꿈 속에서 귀신들에게 시달렸다. 도깨비 떼가 나를 묶어놓고 불 주위를 돌며 제물로 바치는가 하면 군복을 입은 귀신들이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니며 마을 주민들을 학살했다. 매일 밤 귀신은 모습을 바꿔 나타났다. 대낮에도 누가 이름만 불러도 놀라서 주저앉아 울곤 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아팠다. 한 달쯤 지났을까. 지독한 귀신 꿈을 꾼 나는 잠에서 깼다.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달도 없는 밤. 칠흑 같은 어둠 속. 나는 너무나 무서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어머니를 깨우고 싶었다. 그러나 새 아버지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어머니를 깨우는 대신 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난히 목소리가 크고 허스키인 나는 어머니의 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왜 그러니! 서원아!" 놀란 어머니는 나를 껴안으며 물었다. 나는 계속 울기만 했다. "말해봐. 요즘 이름만 불러도 놀라고, 왜 그래? 왜 깼어?" 어머니는 계속 물었다. "귀신이 밤마다 괴롭혀."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울면서 말했다. "엄마가 안아줄게. 엄마 품에서 자. 그럼 귀신 꿈 안 꿀 거야." 그날 밤 오랜만에 어머니 품에서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어머니는 나를 한의원에 데려갔다. "아이가 너무 허해요. 맥도 안 짚일 정돕니다. 진작 데려 오셨어 야죠." 한의사는 한심하다는 듯 안경 너머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약을 지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 약을 달여먹으면 놀라는 증세도 없어지고 귀신 꿈도 안 꿀 거라고 했다. 한약이 용했는지, 한의사가 용했는지 어머니가 달여준 약을 먹고 나는 차츰 차도를 보였다. 3개월이 지나자 귀신 꿈도 사라지고 심장이 뛰는 증세도 사라졌다. 그 동안 나는 어머니 품에서 자는 특권(?)을 누렸다. 겨울이 왔다. 전신마비였던 외할머니가 왼쪽 팔다리를 쓸 수 있게 됐고 말도 할 수 있게 됐다. 소복이 쌓인 눈길을 밟고 어머니는 우리 삼남 매를 데리고 막 이사 간 외할머니 집에 갔다. 마당이 좁은 아담한 양옥이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는 사촌들과 어울려 놀았다. 한참을 놀다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어 마루로 나왔다. 노란 니스 칠이 반짝거리는 예쁜 마루였다. 방문이 불투명 유리로 돼 있는 방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서원 이를 어찌나 때렸는지 뺨이 상했더라구요. 엄마." "웬수 같은 놈. 돈벌이도 못하는 주제에 애한테 손찌검까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를 그토록 구박하던 외할머니가 나를 두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 쫓아내면 거리에 나앉을 텐데요." 새 아버지를 말하는 거였다. 나는 유리문에 내 모습이 비칠까봐 모퉁이에 바싹 몸을 붙이고 엿들었다. "니 에미는 아무리 팔자가 사나워도 남자를 먹여 살리진 않았다." "그렇다고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무작정 내쫓을 순 없잖아요." "조만간 내보내겠어요. 엄마." "내 팔자가 이런 것만도 한스러운데 너까지…."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새 아빠가 하는 일마다 안 된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어머니가 눈에 띄게 새 아빠를 박대하는 이유도 알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내 것이었던 것이다. 고아의식에 시달렸던 나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점에 섰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많은 일들이 눈발이 돼 흩날렸다. 나는 새 아빠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었다. 상처하고 혼자였던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으나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생활에 지쳐 삼남 매의 미래까지 약속한 한 남자에게 기대 살고 싶었 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만나지지 않았다. 그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과 어머니가 감내해 야 하는 부분은 생활이라는 면에선 같았지만 원하는 바는 서로 달랐다. 그는 두 줄기 물살 로 흘렀으나 어머니는 오직 한 줄기 물살로 흘렀다. 어머니가 원한 건 사랑이 아니었다. 낭만적인 한 남자의 꿈과 생존 앞에 선 여자의 꿈은 달랐다. 그 남자는 깨진 꿈 앞에 서 있었으나 어머니는 꿈 대신 삶 앞에 서 있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공유된 운명. 나는 가문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생각했다. 세상의 길을 따르려다 실패한 그들의 문패에 내 이름을 새겨 넣진 않으리라. 남자로부터 내 생을 떼어놓으리라. 나는 독신을 맹세했다. 문학에 내 일생을 걸리라고 굳게굳게 다짐했다. 남자 없이 홀몸으로 거친 세상을 헤쳐와야 했던 모녀의 숨죽인 흐느낌. 외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심지어 새 아버지에 대한 미움까지 두 여자의 눈물 속에서 씻겨지는 느낌이었다. 새 아버지는 가끔 집에 들렀다. 그를 이해하면서도 싫은 건 여전했다. 내 소원은 단 1초도 그의 얼굴을 안 보는 것이었다. 얼마나 싫었는지 그와 같은 성을 가진 친구들은 절대로 사귀지 않았다. 마음 약한 어머니는 가끔씩 들르는 그를 매몰차게 밀어내지 못했다. 그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 손에 만원이나 이 만원이라도 쥐어지는 것도 이유가 됐을 것이다. 겨울 방학 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새 아버지가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먹고 있었다. 황량한 겨울 길을 걸으며 내가 느낀 고독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어 가는 한 마리 겨울 뱀 같아 보였다. 바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덜그럭거리는 그릇소리, 수돗물 소리와 바람소리가 뒤섞여내 귀를 자극했다. 그것은 아득한 들판으로 빗물에 떠내려가는, 혀 잘린 허수아비의 비명 같았다. 방에 들어온 새 아버지는 담배가 떨어졌는지 재떨이를 뒤졌다. 필터밖에 안 남은 꽁초뿐이었다. 한숨 쉬는 새 아버지에게 내가 말했다. "담배 사다줄까?" 새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나 돈 있어." 내가 다시 말했으나 그는 가만히 있었다. "엄마는 언제 나갔어?" 나는 공연히 말을 시켰다. 미워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이빨도, 발톱도 빠져버린 늙은 호랑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담배를 사다주려고 재봉틀 밑에 놓인 돼지 저금통을 집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서원아." 그가 힘없이 나를 불렀다. "500원만 꿔줄래? 이자 쳐서 갚을게." 내 저금통에 든 전 재산이었다. 라면 땅이 10원할 때니까 내게는 꽤 큰돈이었다. 나는 저금통을 찢어 흔쾌히 500원을 꾸어주었다.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새 아버지는 그날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사실 새 아빠가 아니었다. 우리 집에 잠시 머물다 간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스무 살, 내가 자살기도를 하고 깨어났을 때 처음으로 기억 저편의 그 남자가 생각났다. 어머니를 사랑했으나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던 그는 유배된 섬의 외로운 남자였다. 그도 살려고 애를 썼으나 세상은 그를 외면했다. 어머니를 도와주려는 사람마다 일이 안 되는 것 또한 운명 같은 것일까. 어머니의 말 그대로 팔자인 것일까. 아버지가 죽고 나서 어머니는 용한 무당을 찾은 적이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무당이 말했다 한다. "남편 잡아먹고 왔구나! 시집 갈 생각은 아예 말어." 그 남자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할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성공했다면 분명 어머니 앞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의 소식은 영영 들을 수 없었다. 그가 떠나고 오래지 않아 '권'씨 성에 대한 미움도 사라지고 네모난 얼굴형을 가진 남자는 무조건 악마라는 생각도 사라졌다. 그러나 부뚜막에 쭈그리고 앉아 콩나물국을 먹던 그의 애처로운 뒷모습은 오늘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의지 처로 삼고자 했던 새 아버지도 떠나버리고 우리 삼남 매를 키우며 결국 홀로 늙어버 린 어머니. 늙어서 또 손자를 키우는 어머니. 제 2장 피리새는 피리가 없다 초경의 기억 겨우내 얼었던 눈이 녹아 내렸다. 노란 개나리꽃은 활짝 피어 동네 골목 어귀를 장식하고 집집이 장독대를 청소했다. 겨우내 웅크리며 지내던 사람들은 따스한 봄볕을 쬐려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밖으로 나왔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여자들은 겨우내 어떻게 지냈는가,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를 얘기하곤 했다. 벌써 이불을 볕에 너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다. 방을 치우고 반찬을 만드는데 어머니가 통닭을 사들고 들어왔다. "엄마, 벌써 와?" 어머니의 표정이 밝았다. "좋은 일 있어?" 통닭은 든 봉투에 기름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막내가 봉투를 받아 거꾸로 뒤집었다. 튀긴 닭 두 마리가 방바닥에 툭 떨어졌다. "저런!" 어머니는 치킨 봉투를 찢어 흩어진 닭을 그 위에 놓았다. 노란 닭과 하얀 무가 대조적인 빛깔로 내 눈에 들어왔다. 동생들이 치킨을 먹는 동안 나는 어머니가 즐거워하는 이유가 궁금해 다시 물었다. "엄마. 좋은 일이 뭔데?" "응. 엄마가 취직을 했단다. 정식사원이 됐어. 월급도 꼬박 꼬박 나올 거야." "정말이야? 무슨 회산데?" "화공약품을 만들어서 납품하는 회사야." "사장은 남자야?" "그래. 아주 좋은 분이란다. 아빠친구 분이셔." "이젠 맘놓고 살 수 있겠네." "그럼. 물론이지." "이젠 일찍 들어올 수 있겠네." "늦는 날도 있을 거야. 손님 접대를 해야 하거든. 사업상 필요한 거란다." 어머니는 터널을 빠져 나온 걸까. 오랫동안 여기저기 기차를 타고 여행했던 어머니가 이 제 역에 내려짐을 푸는 순간이 온 건가. 우연히 아버지의 해병대 동기를 만나 그 회사에 취직하게 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머니의 퇴근시간이 일정해졌다. 우리 삼남 매는 그 시간이 가까워지면 버스정류장에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내리는 사람을 차례로 지켜보다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면 "엄마다!" 셋이서 합창하여 달려가곤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귀가시간이 자꾸 늦어졌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도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버스 정류장에서 어머니를 기다리지 않았다. 어머니도 기다리지 말고 시간 되면 자라고 말했다. 영업 담당이니 거의 매일 거래처 사람들을 접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어릴 때처럼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잠 못 이루며 마음을 졸이지는 않았다. 대신 모래언덕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어지럼증 때문에 재봉틀 다리를 붙잡고서야 간신히 잠들곤 했다. 나는 점점 더 깊숙이 나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에게 상처 입은 내 마음은 책 속에서 위안을 얻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동화책은 읽지 않았다. 앙드레 지으며 헤세가 어느새 훌쩍 소녀가 돼버린 나의 새로운 연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동경했던 나는 죽음으로 끝나는 소설을 좋아했다. 심리적인 죽음이었지만 주인공과 동화되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것이었다. 소설 속에서 나는 꿈꾸던 죽음을 맛보기도 하고, 삶이 내게 허락하지 않았던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도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의 가면이었다. 얼굴에 쓰면 다른 사람이 되고 벗으면 나로 되돌아오는 마법의 가면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그 마법의 가면을 쓰고 나만의 세상으로 달려갔다. 문학은 곧 구원이었다. 그리고 따스한 봄날, 패널가게에서 우연히 성모마리아를 보고 또 다른 구원을 발견했다. 광휘에 싸인 자애로운 모습. 성모가 낳은 예수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주님을 위해 살 거야. 하지만 주님은 당신의 섭리를 깨닫게 하려고 내 앞에 가파른 계단을 예비하셨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기까지 25년이 걸렸지만 주님이 주는 시련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그 시련이 살아 있는 동안 늘 깨어 있는 삶을 살라는 주님의 뜻임을 알기까지 주님은 내 사랑과 미움의 근원이었다. 여름은 빨리 왔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는가 싶더니 어느덧 더운 열기가 피부에 느껴지는 여름이었다. 2학년 여중생들의 몸도 여름의 열기 만큼이다 더워질 시기였다. 가정시간에 여자의 생리에 대해서 배울 때가 됐던 것이다. 칠판 가득 여자의 몸이 그려지고 초경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이 그러잖아도 후텁지근한 교실을 후끈하게 달궈놓았다. 벌써 초경을 시작한 아이들은 몸의 성숙함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고, 나머지 아이들은 언제 자기 몸이 여성의 징조를 드러낼 것인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임신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가르침은 심리적으로 우리를 자극하고 있었다. 열띤 수업은 종을 친 후에도 계속 됐다. 칠판에 그려진 여자의 몸을 지우기도 전에 시작 종이 울리고 남자 수학 선생님이 들어왔다. 아우성을 쳐대는 반 아이들은 말 그대로 날뛰는 망아지였다. 그날의 기억이 왜 그렇게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일까. 모든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돌아간다. 밝기만 했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내 마음도 온통 회색으로 칠해졌다. 자라는 나를 멈출 수만 있다면…. 시계바늘을 멈출 수만 있다면. 하늘은 성을 내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 번쩍, 아이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나는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낀 하늘과 천둥 번개가 좋았다. 내 속에 응어리진 뭔가를 끄집어 내주는 것 같았던 것이다. 아이들의 새된 비명소리와 천둥소리가 어두운 하늘로 퍼져갔다. 다음 시간은 체육시간이었지만 비가 와서 음악감상으로 대신했다. 모차르트 곡이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마른 잎 구르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는 사춘기 소녀들, 게다가 가정시간의 여파로 자기들 몸에 대한 신비로움과 쑥스러운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친구들은 좀처럼 들뜬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천둥이 우르릉거릴 때마다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들뜬 교실 분위기를 오히려 고조시키고 있었다. 나는 낯선 눈으로 반친구들을 관찰했다. 너희들은 그렇게 기꺼이 어른이 돼가겠지. 여자가 된다는 은밀한 흥분 속에서. 나는 그런 아이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며칠 후 나에게도 손님이 찾아왔다. 몸에서 피가 흐르는 불길한 꿈을 꾸었다. 깨어나서 화장실에 갔더니 실제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천으로 된 생리대를 주면서 미소지었다. 커 가는 딸이 대견해서였으리라. 그러나 여자가 됐다는 증거인 초경은 내게 절망이었다. 증조외할머니에게서 어머니까지 불행한 우리 집안 여자들의 삶이 내게로 이어지지 않을까, 여자로 완성돼 가는 길목에서 나는 불안하고 두려웠다.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피를 흘리고 남자를 받아들이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여자의 자궁이 내게는 저주처럼 느껴졌다. 스물 넷에 첫사랑을 만나 여자인 나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전까지, 여자란 내게 한낱 저주이며 헤어날 길 없는 덫에 불과했다. 여자 신문팔이, 여자 구두닦이 담임은 가정 형편을 고려해 상업학교를 권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나는 인문계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17살이 됐으니 그만 어머니로부터 독립하고 싶기도 했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가는 문제에는 관심도 없었다. 여자는 적당히 직장 생활하다 결혼하면 그만 이라고 생각했다. 온종일 겨울비가 내렸다. 내 마음은 우울했다. 우산을 받쳐들고 동네를 벗어나 발길 닿는 대로 하염없이 걸었다. 바지를 다 적시고 집에 돌아와 나는 굳은 결심을 했다. 상업학교에 진학해도 대학 갈 길은 있을 거야. 우선은 자립해야 해. 어머니 도움을 안 받고 사는 거야. 시험을 치르고 방학이 시작되면 돈벌이에 나서야지. 연합고사를 치르고 겨울방학이 됐다. 만만해 뵈는 돈벌이는 신문팔이였다. 버스 정류장에 서 신문을 파는 소년에게 신문을 어디서 싸게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왜요? 신문 팔려고요?" "응. 나도 해볼까 하구." "힘들 텐데…." "어딘지 가르쳐 줘." 들어오고 나가는 버스가 요란스레 빵빵거렸다. "청량리 역 뒤쪽에 가면 있어요. 못 찾겠으면 그 주변에서 신문 파는 아이들에게 물어봐요." 나는 털모자를 눌러쓰고 운동화 끈을 조이며 이만하면 남자 같아 보이겠지, 마음의 끈까지 여미고 집을 나섰다. 청량리역에 도착해서 신문 파는 곳을 찾았으나 막연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구석진 곳에 있는 창고를 찾았다. 신문이 가득 쌓여 있었다. "신문 주세요." 종이 먼지가 날리는 창고 안에 일부러 남자처럼 힘을 준 내 목소리가 울렸다. 얼굴이 흰 청년이 면장 갑을 끼고 신문을 옮기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너 여자로구나." 그의 첫마디에 나는 맥이 빠졌다. 그렇다고 마음먹은 것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몇 부나 가져갈래?" "100부요." "100부는 무거워서 못 들고 다닐 걸. 남자도 아니고." "그럼 우선 50부부터 팔아 볼께요." 나는 스포츠 신문을 골랐다. 청년은 50부를 건네주었다. 제법 무거웠다. 나는 저금통을 털 어서 마련한 돈을 건넸다. 자, 시작이야. 진짜 생이 시작되는 거야. 신문을 안은 팔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는 용기를 내 스포츠 신문이요. 소리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맘먹은 대로 크게 나와주지 않았다. 작은 목소리로 신문사라고 중얼거리는 나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출근하느라 바빴다. 나는 다방을 돌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신문이 잘 팔리지 않았다. 게다가 다들 나를 빤히 바라보며 신문 살 생각은 않고 "왜 신문팔이를 시작했니? 어머니가 아프시냐? 네가 가장이냐?" 이것저것 묻기만 했다. 청량리역에서 종로2가까지 다방마다 들어가 신문을 팔았으나 절반이나 남았다. 이러다가 본전도 못 챙기겠는걸. 나는 불안해졌다. 종로2가에서 다시 집까지 걸어오며 신문을 팔았다. 땅거미는 지고 다리는 퉁퉁 부었다. 청량리로 가보라던 신문팔이 소년이나를 보더니 실실 웃었다. "아직 많이 남았네요." "너, 나 놀리는구나." "나쁜 애들한테 봉변 안 당한 것만도 다행이에요." "그러니?" "그럼요. 구역 침범하면 죽도록 얻어맞아요." "나머진 네가 팔아서 가져. 난 다리가 너무 아파. 이 일엔 소질이 없나봐." 신문을 소년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거리를 쏘다니느라 피곤했던 나는 밥상을 윗목에 밀어놓은 채 잠에 골아 떨어졌다. 어디론가 한없이 끌려가는 어지럼증을 또 느꼈다. 내가 병에 걸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몸이 약해서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다음날 오후 나는 다시 신문팔이에 도전할 것인가 다른 것을 할 것인가 고민했다. 무작정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구두닦이 청년과 애들이 눈에 띄었다. 저 애들이 날 붙여줄까 생각해 보았으나 구역이 좁아서 안 될 것 같았다. 청량리역까지 걸어갔다. 큰 도둑 루팡처럼 정탐을 잘해야 해. 나는 멀리서 구두닦이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칼날 같이 매서워 코를 베어갈 것 같았다. 역전에서 구두를 들고 나오는 청년이 눈에 띄었다. 착해 보였다. 나는 해가 저물도록 그 청년을 주시했다. 하루종일 말이 없었고 아무리 봐도 눈매가 선량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같았다. 배도 고프고 춥기도 해서 역 안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청년은 가면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기회다. 하고 청년을 쫓아갔다. "오빠. 할 얘기가 있어요." "너 오후 내내 여기서 뭐 하는 거니? 누구 기다려?" 내 짐작대로 청년의 말투는 상스럽지 않았다. 나는 안심이 돼서 말을 이었다. "아뇨. 부탁이 있어서요." "나 같은 놈한테 무슨 부탁이 있냐?" "나도 구두닦이 붙여줘요. 손님 끌어올게요." 청년은 큰 소리로 웃었다. "임마. 넌 여학생이잖아. 그 단발머리로 구두닦이를 하겠단 거야?" "한번 시켜봐요." 청년은 계속 웃기만 했다. "농담 아니에요." "집안이 어려운 애 같진 않아 보이는데?" "돈 벌어야 해요." "나,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나는 등을 돌리고 가려는 청년의 팔을 붙잡았다. "한번 일 시켜봐요." 청년은 옷소매로 코를 쓰윽 문지르고 또 웃었다. "난 진지하단 말이에요." "고집이 세구나." "기회를 줘봐요. 부탁해요." "오늘은 늦어서 안되고 내일 나와봐." "오빠가 대장이에요?" 청년은 또 웃었다. "그래. 내가 대장이다. 너 같은 여학생은 첨 본다." 그는 가버렸다. 운이 좋은 거야. 일단 구두 통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 청년이 내가 진지하다는 것을 믿어줄 것 같았다. 집에 가는 길에 나무를 주워 가지고 갔다. 동생들이 잠든 뒤 나는 부엌 문 뒤에 감춰둔 나무를 꺼냈다. 톱으로 나무를 잘랐다. 자로 치수를 재서 나무를 자르고 못질해서 구두 통을 만들었다. 망치질 소리에 주인이 달려와 잔소리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이 아무 기척이 없었다. 내가 만든 구두 통은 잘 생겨 보였다. 내일 그 청년이 깜짝 놀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구두 통 끈은 헌 벨트를 이용해서 매달았다. 어깨에 걸쳐보니 그런 대로 괜찮았다. 새벽 4시였다. 다음날 아침 그 청년은 나를 보자 놀라 토끼 눈이 됐다. "정말 왔네?" "볼래요?" 나는 보자기에 싸가지고 온 구두 통을 보여주었다. 안에는 검정 구두약, 헝겊, 면장 갑이 들어 있었다. "얘들아! 오늘부터 같이 일할 아가씨다." 나이가 각기 달라 보이는 아이들이 쿡쿡 웃었다. 두고 보라지. 신문팔이는 실패했어도 구두닦이는 실패 안해. 나는 그들의 비웃음을 무시했다. "구두 통 만들어 온 건 가상한데 아직은 필요 없어." "구두 닦는 법 안 가르쳐줘요?" "순서가 있지, 임마. 구두 통은 여기 놔두고 우선 구두부터 모아 가지고 와." 나는 앉아서 구두 닦을 생각만 했지 구두를 모아 가지고 올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잠시 막막해졌다. 멍하니 역을 바라보았다. "벌써 자신 없니?" 애들이 또 쿡쿡 거리며 저마다 일거리를 찾아 흩어졌다. "할거니, 말거니?" 청년이 약간 신경질 조로 말했다. "할 거예요." 눈 딱 감고 다방으로 들어갔다. 되도록 나이든 사람을 골라 구두를 닦으라고 했다. 여자 구두닦이는 처음인지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의 눈은 무시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지면 안 된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화장을 진하게 한 다방 마담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새로 왔니?" "네" "누구네 소속이니?" "청환이네요." "오. 그 청년이라면 도와주지." 마담은 나를 보고 따라 오라고 손짓했다. 신사 네 사람이 마담과 나를 주시했다. "새로 온 구두닦이래요." 마담이나를 소개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내 손엔 구두를 가져가고 나면 신고 있을 손님용 슬리퍼가 들려 있었다. 네 사람은 모두 구두를 벗어 주었다. 어떤 구두가 누구 것인지를 몇 번이고 외웠다.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세퍼트처럼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맙습니다." 손님에게도 인사하고 마담에게도 인사했다. 나는 허겁지겁 청년에게 달려갔다. 내 가슴에 잔뜩 안긴 신발을 보고 모두들 놀랐다. "어떻게 된 거니?" "마담 아줌마가 도와줬어요. 빨리 닦아야 해요!" 나는 구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낡은 구두도 있었고 새것도 있었다. 색깔도 다양했다. "자 빨리! 빨리!" 청한이 오빠는 씩 웃으며 말했다. "넌 신발 받아오는 일만 해. 일당은 충분히 줄게." "알았어요. 또 갔다 올게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시선을 무시하는 용기가 더 생겼다. 여기 저기 다니며 구두를 닦으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날 내가 가져간 구두는 대부분 다방 마담이 도와준 것이었다. 일이 끝난 저녁 청한이 오빠는 2000원을 건네주었다. "내일은 열쇠 가게, 도장 가게에도 가봐." "아, 그렇구나."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다 손님인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다방에서 열쇠 가게로 열쇠 가게에서 도장 가게로 도장 가게에서 다방으로 하루종일 뛰어다녔다. 신발을 잘 안 맡기려고 하는 여자손님도 내가 닦으라고 하면 "어머, 여자네. 닦자, 얘들아"하며 신발을 내주곤 했다. 우리 팀은 활기로 가득 찼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나는 사흘만에 청량리역 일대에서 유명해졌고 나흘만에 15000원을 모았다. 청한이 오빠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며 나보고 빠지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 짓궂은 손님들도 줄어들었다. 이대로 라면 고등학교 등록금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려 피곤한 줄도 몰랐다. 엿새째 되는 날 어둑어둑한 골목을 들어서는데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거의 집에 다다랐는데 남자애들이 와락 덤벼들어 내 양팔을 붙잡았다. 입이 틀어 막힌 채 끌려간 곳은 바람이 씽씽 부는 공터였다. "누군지 알겠지. 쌍년!" 주먹이 날아왔다. 막대기처럼 비쩍 마른 나는 푹 고꾸라졌다. 쓰러진 내 몸 위로 구둣발 세례가 이어졌다. "청량리에 다시 얼씬거리면 그날이 너 제삿날인줄 알아. 너 때문에 우리 단골 다 뺏겼어." 다른 남자애가 또 말했다. "여자라 이 정도로 봐주는 거야." 그들은 일제히 침을 뱉고 돌아섰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와줄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텅빈 어둠뿐이었다. 겁먹지 말고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동생들은 밥상을 엉망으로 해놓고 텔레비전을 켜둔 채 잠들어 있었다. 거울부터 들여다보았다. 다행이 멍이 심하게 들진 않았다. 옷에 묻은 흙이 방바닥에 떨어지지 않게끔 조심조심 걸어 부엌으로 나왔다. 겉옷을 벗어 대야에 담갔다. 밥 먹을 기운도 없었다. 다시 방에 들어와 밥상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자리에 누웠다. 나도 모르게 끙끙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어머니가 흔들어 깨워 요새 뭐하고 다니느냐고, 얼굴은 왜 그러냐고 다그쳤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가지 마. 이따 저녁 때 보자." 어머니는 급히 출근을 했다. 나도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온몸이 결리고 쑤셨다. 이튿날 오후 12시쯤 돼서 몸을 겨우 추스르고 청량리역으로 나갔다. 청한이 오빠는 화를 내려다 내 얼굴을 보더니 "어, 왜 그래?" 했다. "차에 약간 다쳤어." 나는 거짓말을 했다. "교통사고 났었니?" "응. 근데 이젠 괜찮아." "전부 너 찾더라." "그랬어? 일할게." 나는 면장 갑을 끼고 슬리퍼를 집어들었다. 저쪽 구두닦이들이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슴이 떨렸지만 마음을 다져먹었다. 또 한번 그런 일이 생기면 청한이 오빠한테 얘기할 작정이었다. 저리고 시린 몸을 이끌고 여기 저기 다녔다. 얼굴의 멍 때문에 계속 인사를 받아야만 했다. 첫날보다 멍이 더 드러났던 것이었다. 오후 5시쯤 청한이 오빠는 그만 들어 가라고 했다. 내가 몹시 힘들어 보였던 모양 이였다. 돈을 받아들고 돌아오려는데 저쪽 구두닦이 애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다짜고짜 양쪽에서 내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도와줘. 오빠!" 그러나 청한이 오빠는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날은 어둡고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그들이 날 끌고 간 곳은 아무도 없는 창고였다. "겁대가리 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나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고꾸라진 내 목덜미를 한 녀석이 붙잡고 내 목에 칼을 들이댔다. 왠지 겁나지 않았다. 조금 전의 두려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눈을 치뜨고 대장을 노려보았다. 내 기에 질렸는지 칼이 치워졌다. "야, 니들 이리 모여봐." 대장이 애들을 불러모았다. 저희끼리 한참 수군거리다 내 앞으로 오더니 한 아이가 내 얼 굴을 붙잡았다. "얼굴을 작살내줄 테다." "잠깐!" 나는 소리쳤다. 대장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아이가 내 얼굴을 놓아주었다. "오빠들이나를 다치게 하면 우리 아빠가 가만 안 있을 거야. 또 나는 가난해서 이 일을 하는 게 아냐." "거짓말!" "우리 집은 정원도 있어. 오빠네 들하곤 달라." "이년이 이젠 약까지 올리네." "내 말은 난 이 일을 오래 하지 않을 거라는 거야." "당장 그만둬!" "생각해 볼게." 나는 창고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누군가가 따라오려 하자 대장이 "그만둬!"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다음날 우리 팀 애들 얼굴이 엉망이었다. 청한이 오빠는 왼쪽 이마에 가제까지 붙이고 있었다. 저쪽 구두닦이 애들이 히죽거리는 게 보였다. 걔네 들은 모두 다친 데 한 곳 없이 멀쩡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진 거야?" "서원아. 미안하다. 더 이상 같이 일 못하겠어." "왜?" "저쪽 애들은 다섯이야. 우리 애들보다 나이도 많고." "오빠보고 죽인대?" "저쪽 애들 중엔 전과자도 있어. 우리가 감당 못해. 니가 무슨 사정으로 구두닦이를 하려는 진 모르지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 "알았어."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흘러가는 거리에서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걸어서 걸어서 집까지 왔다. 동생들이 밖에서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책갈피에 모아둔 돈을 세어 보았다. 18000원. 입학금을 내고도 남을 만한 돈이었다. 눈물이 번지면서도 입가로 슬며시 웃음이 새나왔다. 처음으로 험한 세상과 싸워 번 돈이었다. 왠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어머니는 내게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야간 상고로 진학하겠다고 했다. 낮에는 돈을 벌 수 있게 취직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는 이제 거래처 사장들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고집스러운 17세 소녀의 방황 꽃샘바람이 불었다. 내년에나 입을 줄 알고 치워놓았던 코트를 다시 꺼내 입고 나는 중소기업에 출근했다. 소방서에 필요한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잔심부름과 청소, 복사를 해오는 일 따위가 전부였다. 일을 하는 동안 새 학기가 오고 단발머리에 고등학교 교복을 입었다. 학교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통 회색인 건물은 교도소 같았고 볕이 안 드는 교정엔 아직 피지 않은 목련나무가 가득했다. 나는 목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통째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목련은 소복을 연상시켰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막 읽은 나는 내가 원하는 길과 현실 사이에서 매우 예민해 있었다. 회사 일이 끝나면 학교에 가서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밤 11시까지 수업을 했다. 대학에 보내주지 않는 어머니를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먹고살기 바쁜 어머니는 딸이 무엇을 원하는지, 뭘 잘 하는지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첨탑 위의 피뢰침 같은 감수성으로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힘들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도 물론 알지 못했다. 하지만 17살의 내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빈 물동이를 이고 걸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미래를 향한 내 의지는 물동이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게다가 내게는 더 넓은 세상으로 마음껏 날아오를 수 있는 책이 있었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문학 책들이 내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학교의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들과 다르다는 자만심 이 나를 버팅 겨 주었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그 또래 보통아이들의 소망을 가슴속에 꽁꽁 숨겨둔 채 나는 마치 카뮈의 소설<이방원>의 주인공 뫼르소라도 되는 양 세상을 냉소적인 눈으로 비웃고 있었다. 몸이 점점 약해졌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밤늦게까지 수업을 받는 게 내 허약한 몸으로는 무리였다. 집에서 숙제를 하다가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대개는 회사에서 짬을 내 숙제를 마치는데 그날 따라 회사 일이 바빠 숙제를 끝내지 못했다. 주산시간이었다. 주산 선생은 여학생들의 따귀를 잘 때리는 사람이었다. 숙제를 다하지 못한 나는 불려 나갔다. 예외 없이 따귀가 날아왔다.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주산 선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뺨을 때리려고 다시 팔을 든 선생의 팔목을 얼른 잡았다. "이쯤에서 그만 하시죠." 주산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팔을 내려놓았다. 나는 내 자리로 들어가 버렸다. 주산 선생은 너무나 기가 막혔던지 얼굴이 벌개지면서 헛웃음을 웃었다. "오늘은 수업 못한다. 너, 교무실로 와." 교실 안이 술렁거리고 주산 선생은 교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교무실로 가지 않았다. 학생을 기계로 생각하는 학교가 싫었다. 학생을 가축 때처럼 몰아붙이는 선생들이 혐오스러웠다. 그날 이후 잠이 들면 나는 꿈인지 생신지, 이상한 환상에 시달렸다. 주판알이 왔다 갔다 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잠드는 것이 괴로웠다. 눈만 감으면 어지럼증과 함께 주판이 괴물 이빨로 변하곤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내 얘기를 했다. 학교를 인문계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대학을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학을 가겠다고 하면 미친 소리 말라고 할 게 뻔했다. 지금껏 영어사전 한 권 사주지 않은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속만 썩이는 아이로 낙인 찍혔다. 알고 보니 어머니의 허락과 상관없이 상업학교에서 인문계 학교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결심을 해야만 했다. 주판알의 환상에 시달리며 계속 학교를 다닐 수는 없었다. 내 앞날은 주판알에 있지 않았다. 나는 주산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규격봉투가 되긴 싫습니다. 선생님'으로 시작되는 내 편지는 깨알같은 글씨로 3장이 됐다. 17살의 나, 무서울 게 없었다. 릴케의 시를 모르고 쇼펜하우어, 플로베르도 안 읽은 주산 선생이나 어른에게 대든다며 무조건 윽박지르는 어머니, 모두가 한심한 속물로 보였다. 17살의 나, 정말 무서운 게 없었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회사에도 나가지 않았다. 대신 덕수궁이나 창경궁을 거닐며 책을 읽고 명상에 잠겼다. 지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열 일곱의 나는 세상에 대한 작은 기대마저 완전히 내려놓았다. 사랑하는 어머니나 가여운 동생들도 더 이상 소중하지 않았다.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창경궁의 희디흰 벚꽃 속에 앉아서 나는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꿈꾸고 있었다. 열 일곱의 나는 굳게 믿었다. 문학이나를 천상으로 이끌어 줄 거라고. 문학이든 무엇이든 이 구질구질한 현실에 굳건히 선 채 피워 올려야 하는, 진흙 탕 속의 연꽃이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5월. 교정에 목련이 만발했다. 나는 문제아가 됐다. 금지된 영화관을 가거나 남자친구를 사귀거나 담배, 술 따위를 먹어서가 아니었다. 선생들에게 나는 감당하기 힘든 학생일 뿐이었다. 학교에 가지도 않는 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담임은 결국 내 자퇴서를 받아주었다. 언제고 복학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나는 다시는 그 황량한 내 열 일곱의 교정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비로소 꿈꾸는 젊음 얼마 후 나는 **신문사에 사환으로 입사했다. 가져오라는 서류도 많았고 재학증명서도 가져가야 했다. 재학생이 아닐 경우 종일 근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자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검정고시학원에 다닐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대학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총무과 직원이 몇 번이나 재학증명서를 가져오라고 독촉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알았다고 대답하곤 가져가지 않았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회사 일은 많았다. 아침에 출근하면 70개나 되는 책상을 닦아야 했고 화장실이며 사무실 안을 청소하고 사원들이 출근하면 서류를 날라야 했다. 점심 시간 1시간을 제외하고 아침 8시부터 퇴근 시간 4시까지 잠시도 엉덩이 붙일 짬이 없었다. 학원에서 공부가 끝나고 캄캄한 밤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서 졸기 일쑤였다. 앞좌석 손잡이에 부딪혀서 입술이 찢어지고 이마에 멍이 들 때도 있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보수는 좋은 편이었다. 그 돈으로 간간이 책을 사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신문사에 다니는 즐거움이 또 하난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친구를 만났다. 나보다 네 살 위인 미스 허는 나이 차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어린 나를 정말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미스 허도 나처럼 문학도였다. 우리는 점심시간이면 낙엽 지는 성공회 뜨락에 앉아 대화에 심취하곤 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것도 미스 허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왜 거짓말을 해? 학원 다닌다고 하면 되잖아." "그러면 7시까지 근무해야 되잖아?" "그렇게 심장을 졸이면서 교복을 입고 다닐 바에야 털어 버리는 게 낫지." "용기가 안나. 고등학교도 안 다닌다고 무시할까봐 겁도 나고." "용기를 내야 돼. 자신을 속이고 사는 건 바보짓이야." "언니. 겨울방학이 되면 사복을 입잖아. 그때 기회 봐서 말해야겠어." 빨간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와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영세는 언제 받았니?" "이번 여름에. 명동성당에서." "신학공부 하고 싶니?" "응. 공부는 뭐든 다 하고 싶어. 한동안은 수녀가 되고 싶었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보지?" "난 저주받은 가문에서 태어났어." 낙엽들은 어깨에도 벤치에도 자꾸 자꾸 떨어져 내렸다. 내가 사랑하는 가을날, 아름다운 가을날이었다. 하늘은 맑고 투명해서 파란 유리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니?" "우리 집은 과부 뿐이야. 조상 때부터 그래서 어렵게 살아왔어." "너도 결혼하면 과부가 될 거라고 생각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믿어." "그래도 사랑은 해야지." "사랑? 난 관심 없어." "저기 연인들 봐. 아름답지 않니?" 노란 스카프를 목에 맨 여자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속삭이고 있었다, 바람이 머리칼을 나부끼게 했다. "여자는 늘 사랑에 인생을 걸지만 난 싫어.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거야. 게다가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 말로만 가능할 뿐이지.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녹스는 거 아냐?"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서로에게 익숙해진 사랑이라고 해서 녹슬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 우리는 끝없이 얘기를 나누었다. 토요일 점심을 함께 먹고 덕수궁 근처에 있는 성공회 뜨락에서 가을날의 어스름이 발끝을 적실 때까지. 미숙했던 대화들. 서랍에서 꺼내 거울에 비춰보면 한 알의 작은 씨앗이 보인다. 먼 여행길에 오른 소녀에게 미스 허라는 성숙한 여자는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아무와도 소통이 불가능했던 사춘기 소녀에게 미스 허는 유일한 친구였고 스승이었다. 겨울, 신문사 일은 더 힘들어졌다. 신문사에는 온수 시설이 돼 있지 않았다. 찬물로 걸레를 빨아 70개의 책상을 닦고 나면 손이 얼얼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나는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양 갈래로 기른 머리도 하나로 묶었다. 그렇게 차리니 스물 두 살쯤 돼 보였다. 성숙해 보이는 탓인지 나를 보는 남자 직원들의 눈길이 이상해졌다.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고 있으면 힘들겠다며 등뒤에서 껴안는 남자도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미스 허한테 의논했더니 자신도 당한 적이 있는 일이라며 바보처럼 가만있지 말고 화를 내라고 했다. 용돈 필요 하냐며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동물적인 남자들에게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 여자 스스로 여자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의기 투합해 분통을 터트렸다. 미스 허 충고대로 심하게 화를 냈더니 직접적으로 추근거리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그래도 그 찜찜한 눈길만은 여전히 느껴져서 소름끼쳤다. 방학이 끝났는데도 나는 교복으로 갈아입지 않았다. 더 이상 신분을 속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4시가 지났는데도 퇴근하지 않는 나를 보고 차장이 말했다. "미스 박. 학교 안 가?" 나는 일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장에게 갔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뭔데?" "저 학교 그만 두었어요." 차장은 깜짝 놀랐다. "아니, 왜?" "벅차서요." "그럼 7시까지 근무할 수 있겠군." "6시까지 근무했으면 해요. 학원에 가야 하거든요." "무슨 학원?" 나는 차마 검정고시를 볼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대학을 간다고 말하면 비웃을 것 같았다. 나는 얼떨결에 미용학원에 간다고 말했다. "미용사가 되게?" "네." "그렇게 해. 그럼. 6시에 퇴근해." 날아갈 것 같았다.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그 동안 이렇게 큰 속박을 주었구나. 진실의 가치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일요일에도 미스 허를 만나곤 했다. 미스 허는 담배를 피웠다. 70년대는 담배를 피우는 여자는 화류계 여자나 한물 간 여자 취급을 받을 때였다.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남자들은 "말세군"하며 비아냥거렸다. 미스 허는 태연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이력이 나 있던 나도 태연했다. 우리는 함께 담배를 피우며 60년대에 이미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웠던 전혜린을 얘기하며 웃고 수다를 떨었다. 그에게서 은밀하게 마르크시즘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하곤 달랐다. 그렇다고 그자 좌익사상에 빠질 만큼의 막시스트는 아니었다. 우리는 어떤 지식이든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속악한 세상에서 우리만 진실을 알고 진실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어느 날인가 그가 도시락을 싸왔다. 빈 사무실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던 나는 함께 도시락을 먹게 돼서 기뻤다.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는 거니?" "응. 하지만 필요한 과목 두 가지만 들어." "영어하고 수학?" "응." "나머지 시간은 뭐하니?" "언니처럼 책 읽고 필요한 공부해." "토요일엔 강의가 없겠네." "응, 나 어디 데려가려고?" "눈치도 빠르다, 얘." 나는 히히 웃었다. 웃다가 밥알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래서 우린 함께 웃었다. 토요일, 미스 허는 나를 명동의 필하모니에 데리고 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져서 카페로 변해버린 곳이지만 그때는 유명한 클래식 음악 감상 실이었다. 표를 끊고 안에 들어서자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다. 너무나 듣고 싶던 클래식이었다. 감상실 안은 자리가 거의 다 차 있었다. 우리는 뒷좌석에 앉았다. 눈을 감고 음악에 심취한 사람이 많았다. 혼자 음악에 심취해 지휘를 하는 남자도 보였다. 머리를 흔들며 지휘하는 남자 때문에 나는 쿡쿡 웃었지만 마음은 두근거렸다. 웅장한 교향곡이 실내 가득 울려 퍼졌다. 우리는 한 시간 반을 듣다 휴게실로 나왔다. "미스 허 오랜만입니다." 장발을 한 청년이 말을 건네 왔다. "안녕하셨어요." "오늘은 친구가 있네요." "네. 인사하세요." 나는 고개를 까닥해 보였다. "자리에 앉으시죠." 또 한 청년이 자리에 와 앉아 인사를 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얘기했다. 음악감상 실에서 나오면서 미스 허는 혼자 자꾸 웃었다. 빗방울이 머리에 떨어지고 있었다. "왜 웃어? 언니." "너 웬 말발이 그렇게 세니. 네가 18살이란 걸 알면 기절초풍할거야." 봄을 무르익게 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미스 허의 긴 머리칼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신비롭게 보였다.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나이에 금지된 다방이나 음악감상 실을 가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들에게 나이를 속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른 살쯤 돼 보였다. 미스 허는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지나치는 사람들이야. 교복문제완 달라. 말 안 하는 것뿐이고 너는 이미 18살이 아니야. 그 남자들 네 논리에 쩔쩔매는 거 못 봤니? 넌 천재야. 너 같은 앤 처음 봤어." 나를 치켜세우는 미스 허의 말을 사춘기의 나는 진짜라고 믿었다. 학문에만 열정을 바치겠다는 생각은 더욱 깊어졌고 순결한 여자로 늙으며 문학을 하는 미래의 내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더는 어른이 되는 내 자신이 두렵지 않았다. 가끔은 외로움을 느꼈지만 고독은 나를 익히는 냄비라고 생각했다. 나는 미스 허를 따라 조계사에도 가고 도선사에도 갔다. 불교에 관한 책들과 인도의 베다, 기이한 성자들의 요가와 명상법도 배웠다. 요가난다나 크리슈나 같은, 벌거벗고 산다는 고행 자들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만일 성기가 발기하면 가짜라고 해서 돌에 맞아 죽는다고 했다. 성경 속에 간음한 여인이 돌에 맞아 죽듯이 고행 자들이 그런 다는 게 재미있었다. 프로이드도 신나게 읽었다. 칼 구스타프 융도 만났다. 나는 빛나는 태양 앞에 서 있었다. 자폐적이었던 나는 미스 허의 격려 속에서 활짝 열린 대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꿈으로 부푼 나는 힘든 직장 생활 속에서도 행복했다. 봄이 깊어가면서 한겨울 물 청소 때문에 트고 갈라진 손등도 아물었다. 더 이상 죽음도 꿈꾸지 않았다. 유년을 극복하고 비로소 꿈꾸기 시작한 나는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꿈의 아픔을 미처 알지 못했다. 하느님, 하느님 5월 5일. 어린이 날이었다. 날씨는 예년에 비해 따뜻했고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투명한 유리병 속에 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버스를 타고 남산 시립도서관에 갔다. 무성한 잎을 드리운 키 큰 나무들 사이사이에 놓인 벤치에 앉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주변 사물들이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무성영화 장면들처럼 느껴졌다. 나뭇가진엔 어떤 아이가 놓친 노란 풍선이 걸려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가지에 찔려 곧 터질 듯 아슬아슬한 풍선…. 흰 제복의 ROTC 3명이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흰 제복이 거의 시들어 가는 저녁 햇빛을 받아 빛났다. 나는 손에 **출판사에서 나온 <구약성서의 이해>를 들고 있었다. "신학생이십니까?" "아니에요." "앉아도 되겠습니까?" 셋은 신기할 정도로 똑같이 잘 생겼고 키도 컸다. 나는 약간 호기심이 생겼다. 어느 대학 학생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얀 제복 위에 빛나는 그들의 학교 배지와 가슴에 달린 명찰이나를 안심시켰다. 대학에 들어가 군대생활을 지원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까? "우린 종교에 관해 문외한이라서…."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있나요." 그들은 졸업반이었다. 물어오는 질문에 답하면서 나는 남자 셋을 상대로 혼자 말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었고, 그들은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들 중 유독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한 사람이 종이쪽지에 자기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내 연락처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는 이름을 말하고 **신문사에서 일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다음날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 학교 축제가 있는데, 파트너로 같이 갈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나는 대학 축제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망설여졌다. 학교를 그만둔 상태이기는 해도 어쨌든 아직 고등학생 나이인데 대학생들의 축제에 가도 되는 것인지…. 더욱이 남자와 단둘이 데이트를 하게 된다는 사실이 적이 부담스러웠다. 그 사람에게 내 신분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 아직 스무 살 안 됐어요. 지금은 학생도 아니고…." "그게 뭐 중요해요? 날 오빠라고 생각하면 되지. 나 따라가 주면 맛있는 것 많이 사줄게요." 5월 8일. 거리에서 지천으로 카네이션을 팔고 있는 어버이날. 그 남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퇴근 후 내가 다니는 신문사 근처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날 나는 흰 블라우스에 어머니가 새로 사준 하늘 색 물방울무늬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굽 낮은 샌들을 신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주 가벼운 차림으로 나타났다. 단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저, 축제 때는 정장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사람은 그날은 전야제이며, 본격적인 축제는 그 다음날 시작된다고 말했다. 전야제는 별로 볼 것이 없으니, 학교는 그 다음날 데려가겠다고 했다. 대신 날은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을 사주겠다고. 그 남자는 내가 어색하지 않게 마치 여동생 다루듯 자연스럽게 나를 대했다. 그 사람 학교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대화 도중 그가 남산 공원에 가자고 했다. "여기 공기가 너무 탁하지 않아요? 내가 남산 공원 구경시켜줄게요. 봄밤엔 분위기가 참 좋아요. 공기도 신선하고.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가도 괜찮은 시간인가 싶어 습관적으로 팔목을 보았지만, 그날 따라 시계를 차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시간을 물어보니 9시라고 했다. "그럼 한 시간만 있다 갈게요." 남산공원은 정말 공기가 신선했다. 길을 따라 철조망이 쳐져 있고 그 너머엔 숲이 우거져 있었다. 긴 길을 걷다가 난 어느새 주위에 인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깊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만 가죠. 지금 몇 시예요?" "12시 넘었어요." "네에? 어머 큰일났네. 진작 알려주셨어야죠." 나는 당황했다. "여관에서 재워줄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언가가 심상치 않았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나는 위험을 느꼈다.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내가 너무 방심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시간을 속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망쳤다. 밤인데다 처음 온 곳이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갔다. 어둠 속에서 금지푯말이 있는 철조망을 넘었다. 바닥이 발에 닿았을 때 발목이 삐끗하면서 뒤로 넘어졌다. 일어서려고 하다가 아래로 미끄러졌다. 머리가 바닥에 닿았다. 헐떡이며 뛰어온 그가 나를 덮쳤다. '살려 주세요, 누구 없어요?' 그는 한 손으로 내 양손을 잡아 뒤로 꺾어 붙이고 한 손으로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몸이 내 몸 전체를 짓눌러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통증과 공포 속에서 주위 사물들이 멀어져갔다. 가물가물했던 의식이 끈을 놓았다. 눈을 떠보니 푸르스름한 새벽 어스름 속에서 샛별이 빛나고 있었다. 주위를 살 펴 보았다. 축축한 땅바닥에는 푸른 나뭇잎들이 뒹굴고 있었고, 옆에 나무 그루터기 밑으로 뿌리가 드러나 있는 게 보였다. 아래쪽에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귀에서 윙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 모습을 보았다. 블라우스 앞단추가 다 떨어져 나갔고 치마도 반쯤은 뜯어져 있었다. 샌들을 찾았지만 한 짝뿐이었다. 아아, 하느님, 하느님…. 일어서서 밝은 쪽을 향해 걸었다. 다행히 찾은 핸드백이 어깨에서 아프게 출렁거렸다. 날이 완전히 밝은 후에야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기사가 이상하다는 듯 룸미러로 힐끗 힐끗 자꾸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흐트러지고 엉망이 된 내 옷차림이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멍청히 밖만 내다볼 뿐이었다. 어머니는 내꼴을 보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어머니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산에서 굴렀어." "무슨 일이 있었어. 바른 대로 말해." "아무 일도 없었어. 남산공원에 놀러갔다가 숲에 들어가 보고 싶어 철조망을 넘었는데 그만 굴러 떨어졌어. 잠시 정신을 잃어서…그 뿐이야." "아니, 거긴 왜 들어가니? 쯧쯧,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지?" 어머니가 나에게 그 정도 관심만 보인 게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나갔다. 출근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다 일요일인 것이 떠올랐다. 자리에 누웠다. 어지러웠다. 방안의 물건들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일까. 그 남자의 얼굴이 돌멩이처럼 날아와 내 얼굴에 박혔다.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순간 하체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나는 그 남자보다 주님을 원망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했다. 손목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묻는 직원들에게 무엇이라 답해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렸다. 나는 미스 허를 찾았다. 전날 일을 털어놓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따라 미스 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내게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했다. 차장의 심부름으로 서류봉투를 들고 세무서를 향했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나는 땅을 딛고 있는 것인지 둥둥 떠다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남자가 옆으로 지나가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맞은편에서 하얀 제복의 ROTC가 오는 게 보였다. 만일 그 남자이면 어떡하나,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콩볶듯 뛰었다.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나를 그는 이상하다는 듯 힐끗 쳐다보고는 지나쳤다. 정신을 차려야 해.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전화 벨소리가 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깜짝 깜짝 놀랐다. 직원들이나를 쳐다보고 자꾸 쑥 덕거리는 것 같았다.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온몸 구석구석 징그러운 벌레가 누비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누로 몸을 씻어냈다. 사무실에서는 퍼런 멍이 든 손목을 수도 없이 씻었다. 예수 님은 날 버렸어, 성모 마리아는 존재하지 않아, 나 는 모든 것을 잃었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분노가 내 가슴속을 태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괴롭힌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끝없는 좌절과 경멸, 그리고 신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 남자에 대한 분노가 끝간 곳 없이 치밀 때면 나는 회사 밖 공중전화로 달려가 그가 가르쳐주었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전화 다이얼을 돌리고 나면 매번 그의 하숙집 아주머니가 퉁명스럽게 그의 부재를 알렸다. 그날 이후 일주일쯤 지났을까.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오후 그와 통화가 됐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심장이 막 뛰기 시작했다. "나예요." "…." 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자기가 좀 있다가 전화하겠다고 하면서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 후 사무실로 그의 전화가 걸려왔다. "왜 전화했어? 날 어떻게 해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괜히 하숙집 찾아오고, 학교 찾아오고 그랬다간 가만 안 놔둘 줄 알아. 니가 다니는 신문사에 찾아가 개망신을 줄 테니까." "…." 거침없는 그의 독설이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나의 귀에 흘러들었다. 나도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그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기를 들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경안정제를 샀다. 심장의 통증이 너무 심했다. 다시는 예수 님을 사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를 벽에서 떼어내 책상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 누웠다. 가슴을 움켜쥐고 다리를 오그린 채 잠을 청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눈이 감기는가 싶더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환상들이 나를 괴롭혔다. 눈을 뜨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온몸을 조이기도 하고 간 절이기도 하는 기묘한 환상이 계속 나를 어지럽혔다.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느낌일 뿐 실제의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며칠 후 나는 다시 그의 하숙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이사가고 없었다. 간헐적으로 심장의 통증이 계속됐다. 그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다.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고는 한잠도 이룰 수가 없었다. 울 수도 없었다. 죽음의 신에게 인심을 잃었다 나는 순결을 지키는 것이 우리 집안 여자들이 겪어온 불행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나는 수녀처럼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날개 잃은 새처럼 나는 삶의 목표를 잃고 허둥거렸다. 이번에는 아무 것도, 그 누구도 위안이 돼주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회사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내가 남자를 사귀다 임신해서 유산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뭇가지에서 새들이 지저귀듯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더 공교로운 일은 학원에서였다. 칠판을 지워주고 청소를 해주는 대신 무료로 공부하는 한 고학생이 자기랑 사귀자고 쫓아다녔다. 내가 냉랭하게 대하며 그를 피아자 그는 협박전화를 했다. 회사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안 만나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매일 전화를 해댔다. 학원에서 그와 마주치는 일이 끔찍했다. 나는 학원을 그만 두었다. 불안과 심장의 통증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사먹었다. 머리가 아프고 가끔씩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미스 허마저 결혼해 회사를 떠났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 안에서 갑자기 눈이 침침해졌다. 주변이 점점 캄캄해지고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 같더니 아무 것도 안 보였다. 머리칼이 곤두섰다. "앞이 안 보여요. 앞이 안 보여요."나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버스 승객들이 술렁거리며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어떤 여자가 어디서 내리느냐고 물었다. 내릴 곳이 가까워질 무렵 차츰 시야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10월. 내 두터운 껍질 속에 웅크린 나는 가을 향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눈이 뿌예지는 경우가 많아져 회사도 그만두었다. 외출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갑자기 숨을 못 쉬고 경련을 일으키다 혼절했다. 쓰러진 나를 어머니가 발견했다. 신경정신과를 찾아갔다. 신경쇠약이라고 했다. 약을 지어주면서 1주일마다 오라고 했다. 차도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경련을 일으키다 정신을 잃곤 했다. 이상한 꿈들이나를 지배하고 날이 갈수록 눈이 안 보였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자신이 잉여인간처럼 느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 회사가 부도났다. 3000만원을 회사에 투자했던 어머니는 다시 알거지가 됐다. 집이 그 지경이 되니까 정신이 들었다. 일단 먹고사는 게 급선무였다. 마음을 굳게 먹으니까 불면증도 차츰 가라앉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식당에서 배달일 을 시작했다. 3일째 되는 날 눈앞이 또 뿌예졌다. 몇 번 테이블이 어디 있는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럴수록 호흡이 가빠졌다. "미스 박, 바쁜데 뭐해!" 지배인이 소리치는 순간 나는 쓰러졌다. 얼마가 지났을까. 방으로 옮겨진 나는 종업원들과 지배인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정신이 들어?" "죄송합니다." 음식이 쏟아진 가운은 얼룩덜룩 엉망이었다. "무슨 병 있어?" 지배인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만두었으면 좋겠어. 3일치 일당은 줄게." 집에 돌아와 나는 몸부림치며 울었다. 포기할 수 없어! 포기할 수 없어! 몸부림칠수록 호흡이 힘겨웠다. 며칠 뒤 어머니에게 다시 취직을 부탁했다. "그 몸 가지고 뭘 한다고 그래." 어머니는 말렸다. 나는 고집을 부렸다. "정말 안 되는지 해봐야 알지." "알았다. 알아보마." 다음날 어머니는 저녁에 들어와 신발 파는 일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무슨 신발인데?" "엄마 회사에서 납품하던 건데 처분하려고 화신백화점 코너를 하나 빌렸어. 보세신발이야. 아가씨가 한 사람 더 있을 거야. 어떡하니. 한푼이라도 건져야지." "당장 할게." 다음날부터 출근했다. 검정 가죽 운동화가 잔뜩 진열돼 있었다. 이번에는 열흘을 일하고 쓰러졌다. 어머니가 달려와 나를 집까지 데려갔다. "집에서 쉬어." "할 수 있어. 조금 쉬면 돼." "누가 지 아비 안 닮았 달까봐 고집이야? 네 몸 좀 봐라. 그게 사람 몸이니? 꼭 허깨비 같다." 다음날 어머니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잘 먹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영양제를 맞으면 나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링거 맞는 것을 한 시간 가량 지켜보다가 회사에 가봐야 된다 고 말했다. "간호사한테 부탁해 놓았다. 다 맞고 집에 가서 쉬어라." 어머니가 간 뒤 나는 링거 약이 빨리 들어가게 조절해놓았다. 빨리 맞고 신발을 팔러 갈 셈이었다.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오후 두 시쯤 되자 병이 비었다. 나는 간호사를 불렀다. 주삿바늘을 빼고 상체를 일으키는데 어지러웠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백화점으로 갔다. 신발 코너는 바로 입구에 있었다. 신발은 잘 팔리는 편이었다. 먼저 나와 있던 아가씨와 나는 신이 나서 "어서 오세요"를 합창했다. 20일 동안 재고 신발을 거의 다 팔아 우리는 수고 비로 20만원씩 받았다. 20일을 견딘 나는 병이 나아가는 줄 알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 다. 그러나 한 페이지를 읽고 나면 하얀 백지로 보였다. 쉬었다 다시 읽고, 그렇게 책을 읽 었다. 푼돈이라도 벌어볼까 하고 조화에도 손을 댔다. 두 세 개씩 조화를 만들어 동네 가게에 맡겨 팔았다. 수입이 시원치 않았지만 안 버는 것보다 낫겠지 싶어 조금씩 만들어 팔았다. 가을이 금세 가고 겨울이 왔다. 나는 어머니에게 또 취직자리를 부탁했다. 부도가 났어도 아직은 거래처 사장들과 친했다. 연줄이 닿아 취직을 했다. 좋은 회사는 아니었다. 속칭 '와리깡'을 하는 곳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달러를 만져보았다. 한동안은 일을 잘 했다. 노상 돌아다니는 일이었지만 할 만했다. 열흘이 지나자 피로가 누적돼 힘이 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자꾸만 토할 것 같았다.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상당량의 달러를 가지고 심부름을 나섰다. 오후 4시쯤 됐을 것이다. 나는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렸다. 사방이 안개 낀 것처럼 뿌예져서 자주 다니는 길이었는데도 어디가 어딘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방향을 가르쳐줘도 나는 같은 자리만 맴돌았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한겨울인데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겨우 방향 감각을 찾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퇴근시간이 1시간 지난 저녁 7시였다. 사장의 얼굴이 험악했다. "죄송합니다. 길을 잃었어요." "길을 잃다니. 어린앤가?" "어, 어지러워서요." "늦었네. 문 닫고 퇴근하게." 사장이 나가자마자 나는 쓰러졌다. 함께 일하는 미스 리가 석유 스토브를 끄다가 쓰러지는 나를 보고 놀랐다. "미스 박! 정신차려!" 나는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어머, 이를 어째. 모두 다 퇴근하고 없는데."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그가 허둥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끌어다 소파에 눕히고 내가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확인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신음소리를 내자 "정신이 들어?" 미스 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여러모로." "이래 가지고 일할 수 있겠어? 거액의 현금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회사는 명동에 있었다. 명동 밤거리를 걸었다. 거리가 또 울퉁불퉁 파도치고 있었다. 내 발이 땅을 딛는 것인지 허공을 딛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집에 어떻게 도착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루 쉬고 다음날 나갔다. 점심을 먹고 심부름을 나갔는데 속이 메슥거리면서 식은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골목에서 주저앉았다가 다 토했다. 일어설 수가 없어서 기어서 전봇대로 갔다. 전봇대에 기대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결혼할 때 받았다던 함 얘기가 떠올랐다. 꽃으로 수놓은 함은 맨 먼저 가문 좋고 후덕한, 나이 많은 부인이 눈을 감고 손을 집어넣어 꺼낸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받은 함 속의 예단 위에 때에 전 흰 버선 한 짝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누가 그 더러운 버선을 넣었는지 영영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고통 속에서 뜬 금 없이 왜 어머니의 함 얘기가 떠올랐을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발이 날리더니 차가운 눈이 내 얼굴 위에 떨어져 녹아 내렸다. 길을 더럽힌 내 토사 물을 흰눈이 가려주었으면…. 시계를 보았다. 긴 시간을 지체한 건 아니었다. 차가 막혔다고 핑계를 대야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슬펐다. 회사에 가니 다행히 사장이 외출하고 없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사장님 화났어?" "미스 박 나간 뒤에 바로 나가서 안 들어오셨어." "다행이다." "쓰러졌니." "아니, 토했어." "미스 박 때문에 나까지 눈치 보여."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컵에 뜨거운 물을 따라 마셨다. 날이 어둑해져서야 사장이 들어왔다. "걱정했어요. 사장님." 미스 리가 얼른 눈치를 보며 말했다. "늦었지. 퇴근들 해. 난 할 일이 있어. 내일은 누가 먼저 출근하는 날이지?" "저예요. 사장님." 내가 대답했다. "늦지 않도록 해." 눈이 쌓여 길거리가 환했다. 미끄러운 골목을 헉헉거리며 올라갔다. 눈발이 약해졌다. 외등에 쌓인 눈이 노란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아빠, 하늘에서 편안하세요? 아버지가 그리웠다. 나를 그렇게도 사랑했던 아버지.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나. 왜 살려고 애쓰지 않았나. 겨울의 찬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점박이 강아지 한 마리가 낑낑거리고 있었다. 동생들은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웬 강아지니?" "엄마가 놓고 갔어." 막내가 말했다. "니가 또 강아지 타령했구나. 얼마 전엔 병아리 더니 이번엔 강아지야? 난 강아지 딱 질색이야. 니가 밥 주고 똥 치우고 다 해." "알았어." "근데 추운데 어린걸 밖에 두면 어떡하니." "누나가 싫어하잖아." "이미 데려온 걸 어떡해. 신발장 옆에 둬." 막내는 내 말에 신이 나서 강아지를 안고 들어왔다. "잡종이지만 예쁘게 생겼다, 얘." 강아지를 한번 안아보았다. 뭉클거리는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애완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겨울 찬바람 속에서 낑낑거리는 강아지가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내 신세 같아서 괜히 애처로웠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몸이 너무나 피곤했고 다리에 쥐가 났다. 나는 약을 먹는데도 왜 차도가 없을까를 생각했다. 엉터리 의사인가. 내 병명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일을 해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나는 병보다도 직장에서 잘릴까봐 그게 더 두려웠다. 어머니는 새벽 두시가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또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었다.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버스는 그날 따라 만원이고 길은 어제 내린 눈으로 미끄러웠다. 회사에 도착해 열쇠로 문을 따고 셔터를 올렸다. 사무실 안은 썰렁했다. 곤로에 석유를 넣고 불을 피웠다. 주전자 물이 미지근하게 데워졌을 때 미스 리가 출근했다. 심부름을 가려고 막 계단에 발을 디뎠는데 눈앞이 시커매지면서 전혀 보이질 않았다. 발은 허공을 딛고 나는 계단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목이 뒤로 꺾이면서 숨이 턱턱 막히고 온몸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야. 미스 박 정신차려."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으로… 돈암동." 나는 택시 안에서 실신했다. 택시 기사가 한숨을 쉬며 "거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오?"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나는 깨어났다. 미스 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이 뿌옜다. 택시는 언덕을 올라 집 앞에 세워주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옆방 아주머니가 나와 문을 열어주며 "어쩔까나, 또 쓰러졌나 보네"했다. 미스 리는 자리를 펴주고 내 코트를 벗겨 주었다. 코트는 흙먼지로 엉망이었고 단추가 깨져 있었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소용없어. 일시적인 발작인 걸." "혼자 두고 가려니 맘이 안 놓이네." "나, 회사에서 잘리겠지?" "미스 박. 나 같으면 몸부터 챙기겠다." 다음날 내가 출근한 것을 보고 미스 리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이 흰 봉투를 내 밀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 미스 박. 한달 치야. 몸부터 치료하게."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몸이 또 마비될 것 같았다. 미스 리가 나를 소파에 앉히고 물을 한 잔 갖다 주었다. 나 자신에 대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장에게 뭔가 한 마디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스 리가 테이블에 놓인 봉투를 내 가방에 넣어주었다. 사장은 책상에 앉아 나를 모른 체했다. 사장을 원망할 순 없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폐만 끼치고 가는군요." 사장은 의자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네." 사무적인 어조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웠다. 어지럼증을 따라 구토도 났다. 집까지 무사히 도착해야 될 텐데….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 싫었다. 온몸의 타박상은 문제가 아니었다. 멍들어 부은 얼굴도. 죽음이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서 와. 어서 와. 이곳에선 너도 편히 쉴 수 있어. 죽음이 네게 속삭였다. 나는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병이 더 악화되면 죽으리라. 죽어서 아빠를 만나리라. 수면제를 감춰두고 나는 책을 읽으려고 했으나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점점 이상해졌다. 1더하기 2만 계산되고 3더하기 4는 계산이 되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잠에 빠지고 정작 자야 할 시간엔 잠이 안 왔다. 잠을 자도 악몽에 시달렸다. 어디론가 한없이 끌려가서 결딴날 것 같은 육체는 몽환 속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했다. 4명의 남자가 나를 발가벗겨서 강간하고 굵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아놓는 광경이었다. 악몽에서 깨어나면 나는 숨이 차서 헉헉거렸다. 도무지 꿈 같지가 않았다. 그 고통은 너무도 생생해서 현실의 일 같았다. 잠에서 깨어날 때 내 팔 다리는 물 속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렸다. 나는 전화벨만 울려도 놀라서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전화기에 방석을 올려놓았다. 내 신경은 날이 갈수록 예민해졌다. 무슨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면 티슈 한 장이 떨어져 있을 정도였다. 나는 남들이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를 맡았다. 환청과 환각도 더 심해졌다. 불을 끄면 어둠 속에서 온갖 모양과 색깔을 가진 것들이 떨어졌다. 삼각형, 사각형, 동그라미들이 무지개처럼 빛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하루는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불을 켜고 방문을 열었다. 강아지가 신발들 사이에서 거품을 물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옆방 아주머니가 놓은 쥐약을 먹은 것이었다. 내 발소리만 들어도 반갑다고 짖어대던 강아지. 내가 대문에 들어서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달려들어서 스타킹에 줄이갈까봐 조심하며 안아주던 강아지였다. 온 식구가 다 나왔다. 강아지는 고통에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을 긁었다. 나는 눈을 감고 강아지의 목을 졸랐다. 눈물이 주르륵 주르륵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강아지는 축 늘어졌다. "효규야. 내일 산에 묻어줘라." 큰 동생에게 말했다. "알았어." 다음날 동생은 학교에 갔다와서 박스에 든 강아지를 산에 묻어주고 왔다. 며칠이 지났을까. 잠을 자려고 하면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어보곤 했다. 나는 점점 제정신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에 시달렸다.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나는 잠을 자다 눈을 번쩍 떴다. "서원아. 서원아. 나와봐." 마당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엄마, 누가 나를 불러. 아빠가 왔나봐." 나는 뛰쳐나가려고 했다. 어머니가 "안 돼" 소리치며 절박하게 내 팔목을 붙잡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한밤중에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가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안돼. 서원아. 나가면 안 돼." "진짜 불렀어. 애절하게 불렀어. 나가야 돼." "환청이야. 나가면 안 돼." 누굴까. 이 밤중에 그토록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분명 들었는데. 환청이 아니었는데. 목소리가 귓가에 남았다. 나는 잘 생각을 않고 멍청히 앉아 있었다. "서원아. 자자. 엄마가 안아줄게." 어머니는 나를 자리에 눕혔다. 병원에 다녀도 내 병은 날이 갈수록 악화됐다. 수전증이 심해져서 컵에 든 물도 밥도 먹기 힘들었다. 파킨슨병에 걸린 사람처럼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밥을 먹었다. 국 종류는 아예 먹을 생각을 말아야 했다. 나는 큰 컵에 물을 조금만 담아 마셨다. 그러지 않으면 다 엎지르기 일쑤였다. 자율신경장애까지 겹쳤다. 물건을 제대로 집을 수가 없었다. 무엇을 집으려면 손이 빗나가 옆에 있는 물건을 건드려 번번이 깨거나 엎지르기 일쑤였다. 걸음도 마음대로 옮기지 못했다. 어느 순간 긴장하면 기계가 작동을 멈추듯 온몸이 굳어 음식물도 넘기지 못했다.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다. 침도 삼키지 못하고 정박아처럼 입 밖으로 질질 흘려야 했다. 침을 닦기 위해 언제나 손수건을 옆에 두었다. 동생들이나를 피하기 시작했고 나는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자책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지붕 위에서 웃고 있는 귀신을 보았다. "귀, 귀신이야!" 어머니는 환각이라며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 어머니는 회사에 투자한 돈을 받으려고 재판에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나는 막연히 무속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영세를 받은 후 성당에 다녀오기만 하면 남산만하게 헛배가 부르던 기억이 났다. 자꾸 귀신이 보이는 게 이상했다. 뭔가를 예감하면 자꾸 들어맞았다. 아무래도 무병 같았다. 내 절망은 끝없이 깊어졌다. 어머니도 나가고 동생들도 학교에 간 날 나는 수면제를 꺼냈다. 200알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콩 집어 먹 듯 약을 삼켰다. 수전증 때문에 약 먹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약을 다 삼키자 고통과 함께 잠이 쏟아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꿈꾸어왔던 자살을 실행해 옮긴 것이었다. 오후 늦게 큰 동생에게 발견됐다.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만일 나흘 안에 깨어나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고 한다. 나흘을 막 넘기 직전이었는가 보다. 나는 내 머리맡에 놓인 해골을 본다. 그리고 뼈다귀를 향해 묻는다. "왜 나를 따라 다니는 거니?"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귀신이 또렷이 대답했다. 어지러움 속에서 나는 깨어났다. 코에 튜브가 끼워져 있고 몹시 아팠다. 온통 하얀 색으로 둘러싸인 중환자 실이었다. 집에 돌아왔다. 163센티미터의 키에 33킬로그램의 몸무게. 내 몸은 앙상한 전나무 가지였다. 손등은 이곳저곳 링거 자국 투성 이었다. 큰 동생은 어머니가 고생하는데 약 따위나 처먹는 장난을 했다고 나를 미워했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때 내 나이 갓 스물이었다. 천형과도 같은 희귀 신경증 극도의 불안, 초조. 지독한 두통까지 나를 괴롭혔다. 어떤 소리도 참아내지 못했다. 음악도 듣지 못하게 됐다. 이 세상의 온갖 소리들이 내 신경을 괴롭혔고, 눈은 반쯤 실명상태였다. 전신마비가 오면 눈도 혀도 움직이지 못했다. 의식만 살아 있을 뿐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대변, 소변도 보기 힘들었다. 수 없는 증상들의 반복. 나는 걷지도 못하고 누워서 가느다랗 게 숨만 쉬었다. 태어난 것을 저주하고 어머니의 자궁을 저주했다. 이제 다시는 공부할 수 없어, 이제 다시는 공부할 수 없어. 순결한 몸으로 일생을 보내며 학문에만 전념하리라는 내 열망은 불에 타버린 재로 흩날렸다. 큰외삼촌이 집에 놀러왔다. 나를 보고 놀라 어머니에게 난리를 쳤다. "애를 저 지경으로 그냥 둬 그래? 누나 정신이 있어 없어." "병원에 다녔어." "병원도 병원 나름이지. 애가 숨도 제대로 못 쉬잖아." 큰외삼촌의 권유로 한양대학병원 신경정신과를 찾아갔다. 나는 발음도 제대로 안 되는 혀로 말하다가 발작을 일으켰다. 그날로 입원했다. 단계적으로 검사를 하고 뇌파를 찍었다. 악성 뇌종양이거나 간질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당시 한양대학병원에 처음으로 도입한 최첨단 의료장비인 MRI를 찍었다. 첨단 장비인 만큼 촬영료도 비쌌다. 어머니는 빚을 냈다.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병원비가 엄청났다. 야릇한 오기가 생겨났다. 내 힘으로 그 돈을 꼭 갚을 거야. 가닥만 남은 의식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륨 주사를 맞고서야 겨우 잠들곤 했다. MRI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온갖 테스트를 다 했다. 내 신경은 다른 사람들보다 7배나 예민하다고 했다. 체중미달과 영양실조, 7배 예민한 신경은 의사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MRI 결과 뇌는 깨끗했다. 병명을 찾을 길이 없었다. 나는 의사들에게 몇 번이고 증세를 반복해서 말해야 했다. 병명을 아는데 한 달이 걸렸다. 나콜렙시(Narcolepsy), 일명 기면증 이었다. 신경증 중에서 가장 희귀하다는 병. 주 증세는 시도 때도 없이 경련을 일으키다 기절하듯 잠이 드는 것과 전신마비라고 했다. 잠들 무렵 환상에 시달리는 것도 기면증의 특징이라 했다. 기면증은 아직도 연구 중에 있는 신경증인데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환자 수도 손에 꼽는다. 나는 한양대학병원의 김광일 박사가 맡은 환자 중에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의 기면증 환자라고 했다. 약 처방을 받고 퇴원했다. 그러나 약물에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 가려웠다. 약 처방을 거듭해서 세 번째 약이 몸에 맞다 는 것 을 알았다. 에나폰과 트리민이었다. 한 움큼씩 약을 먹었다. 어지러워서 집안에서도 기어다녔다. 외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잘 때 다리가 쥐가 나 방안을 헤매기도 했다. 어머니 회사에 같이 근무했던 박 아저씨란 분이 어머니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가 나를 병원에 데려갔다. 일주일에 두 번. 밖에 나가면 어디가 어딘지 몰랐다. 모든 사물들은 안개 속에서 부유했다. 마비를 일으키면 한 시간 가량 정신을 잃었다. 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가뭄이 들어 메마르고 갈라진 땅이었다. 6개월만에 차도를 보였다. 혼자 걸어다닐 수 있었다. 육교나 지하도는 아직 건너지 못했지만 병원에는 혼자 다닐 수 있었다. 수전증 때문에 서류를 쓸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썼지만 그건 글씨가 아니었다. 어떤 아저씨가 대신 써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마비를 일으키곤 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간질인가 봐"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발작을 하다 잠에 빠져버리면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비가 오는 경우엔 몸이 말을 안 들을 뿐 의식은 멀쩡했다. 멀쩡한 의식으로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길거리에 누워 구경거리가 돼야 했다. 차라리 잠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아가씨. 정신 차려요." 나는 말하고 싶었지만 혀가 굳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참. 이걸 어쩌나." 나는 그 사람이 내 주머니를 뒤지기만 바랐다. 만약을 대비해 어머니 연락처를 종이에 적어 놓았던 것이다. "전화 번호가 여기 있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 아저씨와 어머니가 달려왔다. "고맙습니다." "어린 아가씨가 어쩌다…." 박 아저씨가 나를 업고 택시를 잡았다. 박 아저씨 등에서 축 늘어진 내 팔 다리가 이리저리 흐느적거렸다. 집에 돌아와 30분쯤 지나서 마비가 풀렸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온몸에 통증이 시작됐다. 대창에 전신을 꿰이는 것 같았다. 때로는 전기고문을 받는 것 같은 육체적 형벌이 찾아오곤 했다. 악몽을 자주 꾸었다. 악몽을 꾸면 잠에서 깬 후에도 한동안 악몽을 꾸는 흥분상태가 지속돼 아무 물건이나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부수어 버렸다. 그때만큼은 미친 사람처럼 기운이 넘쳤다. 1년이 지났다. 시야가 훨씬 밝아졌다. 나는 책을 붙잡았다. 문학을 해야 한다는 집념이 다시 불타기 시작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베스트셀러였을 때였다. 몇 줄만 읽으면 다음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책을 덮고 뭔가 할 일을 찾았다. 연탄불도 갈고 반찬도 말들어 보고 싶었다. 일하고 싶었다. 너무나 간절하게 일하고 싶었다. 연탄불을 갈다 또 마비가 됐다. 차디찬 부엌바닥에 1시간을 쓰러져 있었다, 마비가 풀리면 다시 일어서서 부엌일을 했다. 물 미역을 무친다고 안 보이는 눈으로 물 미역 줄기를 썰다가 손톱의 삼분 의 1이 잘려나갔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잘려나간 손톱을 찾느라 애먹었다. 그렇게 물 미역을 무쳐놓고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다음 줄을 읽었다. 몇 줄 읽고 나면 또 글씨가 안 보였다. 책을 놓고 다른 일을 찾았다. 수놓는 일을 해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나비를 수놓다가, 다시 책을 붙잡고 읽다가, 그렇게 해서 하루만에 한 장을 읽어냈다. 두 달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어. 열심히 노력하 면 될 거야 문학을 할거야. 난 해낼 수 있어. 하지만 병원비가 없어 어머니는 잡힐 수 있는 물건은 다 전당포에 잡힌 상태였고 그런 현실은 나를 옥죄었다. 사정 얘기를 들은 김광일 박사는 특별 배려를 해주었다. 약 이름을 적어주며 약국에서 사먹으라고 했다. 약값은 20분의 1로 줄어들었다. 내 긴 투병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병이 서서히 나아가는 대신 나는 약물 중독자가 돼 있었다. 그 많던 머리숱은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이들의 노래처럼 내 삶도 새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한번 시작한 삶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내야만 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의 슬픈 운명이었다. 기나긴 투병생활 어머니는 산동네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남은 전세금으로 종로 3가에 곱창 집을 낸다고 했다. 성숙한 여자가 된 나와 다 큰 남자가 돼 가는 동생들과 한방에서 생활하려니 많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대입을 앞두고 있던 큰 동생은 나보다 더 불편했을 것이다. 동생은 친구 집에서 머물다 오곤 했다. 동생들이나를 싫어하는 건 당연했다. 내 히스테리가 정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나 자신에 대한 경멸감은 히스테리로 돌변하곤 했다.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이 아플 때면 있는 대로 비명을 질러댔다. 아무에게 마구 신경질을 부려대는 히스테리, 온몸이 꽈배기처럼 꼬이는 증세를 병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작을 일으키고 호흡곤란이 오고 내장과 머리가 파열되는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해도 들어주는 사람 역시 없었다. 나는 버려진 존재였다. 주님. 왜 날 버리셨어요. 가끔씩 예수는 내 안에서 물위를 걷고 있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성경구절이 맴돌았다. 죽을 수 없다면 살아야 해. 나는 식구들의 빨래를 했다. 어린 시절 그렇게도 싫어하던 밥짓기, 빨래하기, 반찬 만들기가 이제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기초화장품이 떨어져 얼굴엔 버짐 꽃이 피고 옷이 없어서 여름에도 가을 옷을 입고 살았지만, 기어다니던 상태에서 일상적인 일이나마 할 수 있는 것이 내게는 크나큰 행복이었다. 곱창 장사를 할 가게를 얻어놓고 한숨쉬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서원아, 가게가 너무 더러워서 도저히 청소할 수가 없어." "그렇게 더러워?" "어이구. 말도 마라. 죽은 쥐에 구더기에…." "내가 가볼게." "네가 어떻게 하겠니. 몸도 그런 애가…." "엄마, 며칠 전 부엌에서 쥐를 때려잡았어. 매일 들락날락거리던 놈인데 내가 잡았다고." "니가 어떻게 쥐를 잡니?" "정말이라니까. 당장 가자, 엄마. 내가 청소해줄게." 어머니와 나는 빗자루, 양동이, 고무장갑 등 청소도구로 중무장을 하고 버스를 탔다. 종로3가 뒷골목 가게에 도착했다. 옆가게인 중국 집 사장이 나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내 딸이에요." 어머니는 나를 소개했다. "따님이 청소하시게요?" "예." 어머니는 웬일인지 기쁜 얼굴로 나를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리한 내 얼굴을 보면서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비웃는 듯한 얼굴을 보자 더 자신감이 생겼다. 어머니는 가게문을 따주고는 바로 돌아섰다. 도대체 어떤 지경이기에 어머니가 저 러실까? 가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에 죽은 쥐와 구더기, 똥이 널려 있었다. 악취가 코를 쥐게 만들었다. 나는 가게에서 나왔다.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 수 있겠니?" 하고 물었다. "심하긴 심하네. 엄마. 마스크 좀 줘. 양동이에 물을 담아 놓고." 나는 마치 전쟁터에 나가기 전 들떠 있는 초병 같은 느낌이었다. 히스테리나 부리고 발작만 일으키는 병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바지를 걷어붙이고 마스크를 하고 머리에 수건을 썼다. 고무장갑도 끼었다. "걱정 말고 기다려. 엄마." 나는 죽은 쥐부터 쓰레기 봉투에 담았다. 사방에 깔린 쥐똥과 구더기는 양은 쓰레받기에 담아 버렸다. 구더기도 거의 죽어 있었다. 내가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오자 어머니는 "다 치웠니?" 물었고 지켜보던 사장은 아연해서 나를 쳐다보았다. "따님, 곱게 키우신 거 같은데 어떻게 저런 일을 해요?" "우리 애 일 잘해요." 어머니는 잠시 내가 아픈 딸이라는 것을 잊고 즐거워했다. "엄마. 가루비누로 물 청소만 하면 돼." 나는 양말을 벗고 슬리퍼로 바꿔 신었다. 초여름의 산뜻한 기온이 피부에 와 닿았다. 어머니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깨끗이 다 치운 다음에 들어가." 나는 물이 가득찬 양동이와 세제를 들고 들어갔다. 바닥에 눌어붙은 때를 비눗물에 불려 빗자루로 싹싹 문질러 닦았다. 다 닦고 나니 바닥이 말끔해졌다. "엄마. 다 됐어." 어머니는 안을 들여다보더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화덕을 들여놓고 어머니가 개업하는 날까지 일을 도왔다. 개업식 팥떡을 돌리는 일도 내가 맡았다. 가는 데마다 "아가씨가 장사해요?"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어머니 일을 도울 작정이었다. 며칠은 만원이었다. 곱창 굽는 연기 때문에 항의도 들어왔지만 양해를 구했다. 내 건강은 오래 견뎌내지 못했다. 식은땀이 흐르고 경련이 나기 시작했다. 온몸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방안을 헤매고 다녔다. 어머니도 장사 나가고 동생들도 학교 간 텅빈 방에서 대창을 피해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1시간이나 2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면 진정이 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손톱 끝이 잘려나가 피가 묻어 있었다. 너덜너덜한 손끝이 아팠다. 손톱깎이로 깨끗이 잘라내고 소독약으로 헹궈냈다. 나는 병에 익숙해져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병에 익숙해지는 것이 병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병과 친구가 되기로 했다. 발작과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나를 타일렀다.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었다. 카프카의 작품집도 사서 읽었다. 한 달에 두 권을 소화해내기 힘들었다. 흐려지는 눈과 지독한 두통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책을 읽지 않으면 배가 고픈 것 같았다. 한겨울이 됐다. 구두도 낡아 더는 신을 수 없었고 겨울 스웨터도 없었다. 나는 얇은 가을 옷을 몇 겹씩 껴입고 다 헤진 운동화를 신고 겨울을 났다.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었고, 병든 내 육체와 싸우며 틈틈이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빨래며 설거지며 집안일 을 거둘 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창 발랄하고 싱그러워야 할 20대 초반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집안에 틀어박혀 겨울잠을 자는 곰이었다. 간혹 외출을 하면 내가 살아있는 사람으로 느껴지질 않았다. 생기 있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 멍청하게 서서, 내 어깨를 부딪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내가 과연 살아있는 것일까 의심스러웠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제 3 장 9년의 숨은 사랑 내 인생에 비쳐든 햇살 어머니가 꾸려온 곱창 집은 근처에 큰 음식점들이 생기면서 손님이 줄어 결국 개업 2년 반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무겁게 내 가슴을 짓눌렀다. 워낙 야무지고 매몰찬 데가 없는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우리 3남매를 먹여 살리느라 이미 녹초가 돼 있었다. 무작정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내 몸으로 버틸 수 있는 일자리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한 달 이상 버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쓰러져서 낯선 사람이나 순경의 등에 업혀 돌아오기를 수차례. 취직을 하고 발작을 일으켜서 잘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샛노란 개나리가 활짝 핀 어는 봄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꽃가게가 눈에 띄었다. 새로 개업한 집이었다. '꽃꽂이 할 줄 아는 분. 25세 미만.'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느새 나는 약간의 화장기에 얌전한 스커트 차림을 한 24살의 숙녀였다. "어서 오세요."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중년 남자가 바구니에 장미와 안개꽃을 꽂으며 나를 맞았다. "저…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써 있던데요." "아가씨가 하려고요?" "네. 저 꽃꽂이 잘해요." 자신 있게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걱정이 됐다. 근무시간이 길면 또 한 달을 못 버티고 잘릴 것이었다. "이거 마저 꽂아볼래요?" 나는 두말없이 주인이 비워주는 의자에 앉아 능숙하게 꽃을 꽂았다. "여기 보랏빛 패랭이를 끼워 넣으면 훨씬 돋보일 텐데요." 주인은 이리저리 꽃바구니를 둘러보더니 보랏빛 패랭이를 가져왔다. 나는 두 가지만 골라 가위로 여러 토막을 낸 뒤 군데군데 꽂아 넣었다. "정말 훨씬 돋보이는군. 나보다 나은데. 아가씨는 꽃꽂이를 언제 배웠나?" "중학교 2학년 때 조화를 만들면서 시작했어요. 정식으로 배운 건 스물 두살 때고요." "지금은 몇 살인데?" "스물 넷이요." "아가씨가 우리 집에 안성맞춤인 것 같은데… 오늘부터 일할 수 있죠? 참, 이름이 뭐지?" "박서원이요. 근데요, 사장님. 몇 시에 출근하고 몇 시에 퇴근해요?"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말인가 싶어 빤히 바라보는 사장을 보면서 제발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대학생이야?" "아뇨. 하지만 공부해요." "몇 시에 출근하고 싶어서 그러나?" 밝았던 사장의 안색이 약간 굳어서 나는 틀렸구나, 생각했다. 대답 대신 짧은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서 있자 사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요. 몇 명 다녀갔지만 모두 마음에 안 들었어요. 아가씨는 꽃가게 점원으로 안성맞춤이야."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사장이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배짱으로 밀어붙여 보였다. "1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면 안 될까요? 대신 일이 많을 땐 조금 더 있을 게요." 내 말에 사장은 허허 웃었다. "이거 완전히 일꾼 마음 대로네. 그렇게 해요. 하지만 가게 일에 지장을 주면 안 돼요." "알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시간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됐으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꽃집 아가씨가 됐다.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고작 5시간 근무인데도 내 몸에는 역시 무리였다. 기면증 치료를 위해 약을 먹으면 약기 운이 돌기 시작하면서 오관이 조이는 듯한 통증 속에 잠이 쏟아졌다. 그럴 때 잠을 자야 하지만 일을 해야 하니 그 통증과 졸음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는 일과 보수가 다 마음에 들어 난생 처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통증을 참아낼 수 있었다. 꽃집에서의 다섯 시간 근무, 보수래야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의 대우에도 감지덕지할 만큼 그때까지 내 인생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내게는 꽃집에 지천으로 널린 아름다운 꽃이며 하루종일 코끝에 맴도는 꽃향기들이 희미하나마 내 인생에 막 비치기 시작한 서광처럼만 느껴졌다. 어느 날 퇴근 무렵 사장이 반백의 신사와 함께 들어왔다. "이 집인가? 꽤 큰데." "다 망해먹고 이 꽃집 하나 남았네." 사장의 친구인 듯 보이는 그 사람은 키가 작았지만 어딘지 품위가 흘렀다. "박양. 인사하게. 내 고등학교 동창이야. 법학교수지." 참 멋진 신사다. 저런 분이 우리 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퇴근 준비를 하던 것도 잊어버린 채 그를 남몰래 힐끗거리고 있었다. 문득 세상을 떠난 아버지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박양. 일찍 가야 되나? 내 친구도 오고 했으니 내가 근사하게 한턱 사지." 저렇게 멋진 분과 함께 식사를 하다니. 나는 속으로 야호! 쾌재를 불렀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 신사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 이 사람 보게. 우리 박양에게 완전히 넋이 빠진 모양이네. 남의 아가씨 얼굴은 왜 그렇게 유심히 보나?" "아, 아니…. 누구를 많이 닮은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서…." 친구의 지적을 받고 좀 머쓱했는지 그 사람은 더 이상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주로 사장이 내게 이런 저런 말을 시켰다.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다 무슨 말끝엔가 아버지가 해병대 5기생이었다는 말이 나왔다. 거의 듣기만 하던 그가 불쑥 대화에 끼여들었다. "아버님 함자가 어떻게 되죠?" 내 대답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랬구먼. 어쩐지 누구를 닮았다 싶더니…." "아버지를 아세요?" "아버지가 내 고향 선배예요."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다니. "우린 의형제를 맺을 만큼 친한 사이였어요. 내가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지만…. 내 잘못이 커요. 나 살기 바빠서 형을 찾아보지도 못했으니…." 그의 눈동자가 아련한 옛추억에 잠기는 듯했다. "잠 재주가 많은 분이셨는데… 살아 계셨으면 뛰어난 시인이 됐을 거예요." "네?" "아버지가 군대시절 등단한 시인이라는 거 몰랐어요?" 아버지가 글쓰기를 즐겼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등단한 시인이라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여덟살 때 피를 쏟다 돌아가신 아버지. 그 파리한 얼굴도 16년의 세월 속에서 흐려져 가는데, 아버지의 마음 속 깊숙이 스며 있던, 시에 대한 사랑이 어린 딸의 가슴으로 이어져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못 다한 아버지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내 핏속에서 부활한 것인지도 몰랐다. 부모와 자식이란 그렇듯 끈끈히 이어져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구나, 나는 처음으로 내 핏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아버지를 느꼈다. 말없던 그 신사는 옛추억 탓인지 그날 내게 아버지 얘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아련하게 잊혀졌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게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단,s 얘기를 듣고 보니 그가 아버지인 듯 새삼 정겹고 반가웠다. "서원양도 아버지를 닮아서 문학에 재주가 있나? 말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은데…."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서원양은 시쪽인가? 소설 쪽인가?" "시요." "시나 소설을 쓰는 재주가 다른가?" "저도 잘은 모르지만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어떻게? 나는 법밖에 몰라서 말이야." 그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점점 흥이 올랐다. 점잖은 교수가 어린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발병한 이후 누군가와 마음 속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눠본 기억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해 굳게 닫혔던 내 마음의 빗장이 나도 모르게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함께 온 사장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대화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가슴속에 묻혀 있다가 한꺼번에 토해져 나오는 무수한 이야기들을 그만 되삼 켜야만 했다. 헤어지면서 그는 내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서원 양을 만나니 아버님을 만난 듯 좋네요. 아버님 가시는 것도 못 보고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제부터는 나를 작은아버지라고 생각해요. 아버님과 의형제를 맺었으니 작은아버지는 작은아버지지. 앞으로 자주 연락해요." 사장의 친구로 우연히 만난 반백의 신사를 작은아버지로 삼고 헤어진 그날, 나는 오랜만에 병든 몸이 날아갈 듯 경쾌하고 즐거웠다. "엄마, 나 오늘 작은아버지 만났다." "작은아버지라니?" 집에 들어오면 탈진해서 쓰러져 눕던 내가 그날은 웬일로 엄마 곁에 앉아 그날의 놀라운 우연을 미주알고주알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니 아빠한테 의형제를 맺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엄마가 돼 가지고 뭐 그래? 아빠가 군대 시절 등단한 시인이었다면서? 엄마는 어떻게 그런 것도 몰라?" "아빠가 말 안 했으니까 모르지." "아빠 원고도 안 읽어봤어?" "간직만 해서 그냥 너한테 줬지. 내가 읽으면 뭘 아니?"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시인이었다는 것도, 아버지의 그런 피가 내게로 이어져 흐른다는 것도 어머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얘. 그만 자라. 그 사람이 작은아버지면 우릴 먹여주기라도 한 대니?" 어머니는 그렇게 들뜬 내 마음을 여지없이 잘라버렸다. 어머니는 먹고사는 것밖에 관심이 없었다. 남편 없이 살아가는 여자들은 다 그럴까? 어머니의 단순한 면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문학에 대한 열정이 더욱 솟구쳐 올랐다. 세속적인 어머니에 대한 오기나 반감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곤하게 잠이 든 어머니 곁에서 나는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그 신사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어린 내 이야기에 그토록 진지하게 귀기울여주던 모습 역시 좀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남자로 다가온 '작은아버지' 일주일 뒤 작은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친 작은아버지처럼 내 건강을 염려했다. "얼굴 색이 왜 이렇게 안 좋지? 젊은 아가씨가. 어디 아픈가?" 그의 걱정스런 따스한 목소리를 듣자 웬일인지 가슴속에서 울컥 눈물덩어리가 치솟는 것 같았다. 크게 앓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짐작할 것이다. 오래 앓다보면 점점 자신이 천덕꾸러기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처음엔 가슴 졸이던 주변 사람들도 차츰 병에 익숙해지고 병시중에 지치게 된다. 하물며 먹고살기도 힘든 우리 집 형편에서야…. 그의 나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내 삶의 황폐를 섬뜩하게 떠올려주었던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동안 내 마음에 드리워진 그늘을 다 털어놓고 싶었다.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투정부리듯. 그러나 그는 아직 타인이었다. "네. 조금." "몸이 약한 것도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네. 그래도 아버지는 참 재주가 많았는데. 손재주가 좋아서 만들고 고치는 데는 아버지를 따라 갈 사람이 없었어. 하긴 서원양도 꽃꽂이를 아주 잘한다는 거 보니까 손재주가 좋겠군."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이 기분 좋았다. 어머니와 나는 참 많이 달라서 의아했는데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은 모양이었다. 문득 작은아버지라면 봉제완구 디자이너가 필요한 회사를 소개시켜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손으로 만들기를 좋아하는 나는 3년 넘게 집에만 있는 동안 봉제완구를 직접 디자인해서 만드는 일을 익혀왔던 것이다. "완구 디자인도 할 줄 알아요." "그래? 어떤 완구?" "봉제 완구요." "봉제 완구라면 내가 잘 아는 회사가 있는데. 법정 소송이 걸렸을 때 내가 도와주었거든." 나는, 잔잔하던 바다도 내가 배를 타기만 하면 풍랑이 인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강박관념을 처음으로 깨준 곳이 꽃가게였다. 꽃가게의 구인표지를 보는 순간 내 인생에도 처음으로 풍랑이 잠자기 시작한 것이었다. 작은아버지는 나를 더 넓은 바다로 보내주는 순풍이었다. "소개해줄까?" 그러기를 기대하고 던진 말이었지만 일이 너무 잘 풀리자 갑자기 불안이 밀려들었다. 내 인생에도 이런 행운이 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그 회사에도 일하는 디자이너가 있을 것 아니에요." "일단 알아보지. 디자이너가 있다 해도 더 참신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서원양은 아버지를 닮았으니 잘 할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요. 이제 겨우 두 번째 보는 거지만 왠지 그런 믿음이 드는 걸." 작은아버지는 일주일이나 2주일에 한 번쯤 연락을 해왔다. 그를 만나면 나는 어린아이처럼 잘도 종알거렸고, 말이 많아진 만큼 스물 네 해 동안 자라온 슬픔의 덩어리들이 녹아 내렸다. 그가 보여주는 따뜻한 관심과 배려. 내 삶에선 처음이었다. 그 관심과 배려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곪을 대로 곪은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형과는 같은 내 병, 그리고 환자인 내 등에 짐지워져 있는 가족들의 막막한 생계. 이 모든 얘기를 듣고 그는 조용히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병든 강아지를 어루만지듯 내 등을 토닥이는 그 손길 속에 한없는 연민과 격려가 담겨 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단 한번도 세상으로부터 진실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던 내 황폐한 삶에도 작은 오아시스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었다. 1983년 6월 3일. 그날 나는 약간 감기 기운이 있었고 초록색 바탕에 하얀 물 방을 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봉제완구회사 사장을 소개해주기로 한 그날, 나는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흥분과 기다림으로 초조하게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봉제 회사 사장보다 1시간 먼저 만나기로 한 작은아버지가 들어섰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또 발작이 시작되는구나. 처음으로 내게 호의를 보여준 사람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이게 되다니…. 그러나 이번엔 이상하게도 발작의 다른 징조 대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야릇한 느낌. 내게로 서서히 다가오는 그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내 심장 속으로 뛰어드는 듯했다. 아니, 내 전 존재의 에너지가 무지개가 돼서 그에게로 건너가는 듯했다. "잘 지냈니?" 그의 인사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 있었나?" 그의 음성이 선지자에게 은밀히 다가오는 신의 음성처럼 내 고막을 두드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런, 이런." 그가 손수건을 꺼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무슨 일이지?"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내 스스로도 당황 스러웠다. 초면도 아닌 낯익은 얼굴에, 지금이 순간 어쩌면 이토록 완전하게 사로잡힐 수 있는 것인지, 나도 자신을 납득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게로구나. 말못할 일이니?"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당신이, 작은아버지인 당신이, 내 아버지 나이에 가까운 당신이 오늘 내게 한 남자로 선뜻 다가섰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순수하게 인간적인 사랑으로 나를 대하는 그분 앞에서. "여기서 누구라도 마주쳤어?" "아니요.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무슨 일인데 우리 아가씨를 울렸나?" 그의 말투가 재미있어서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뺨에는 눈물이 얼룩진 채로. "그것 봐. 웃으니까 얼마나 예쁘니?" 잠시 후 봉제회사 사장이 도착했다. 하늘 색 와이셔츠에 옅은 곤색 여름 양복을 입은 그는 미혼의 젊은 남자였다. 나는 그 동안 디자인 해온 봉제완구 스케치를 내보였다. 사장은 내 스케치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근무는 못 하신다구요?" "네. 집에서 일하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회사에 가서 제품을 보면 좋겠어요." "김 교수님 부탁도 있고, 또 디자인도 마음에 드는군요. 외국 바이어들이 좋아하겠어요. 원하시는 대로하지요." 월급을 정했다. 그 정도면 가족을 부양하고 저축까지 할 수 있는 돈이었다. 사장이 가고,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칵테일을 사달라고 졸랐다. "몸 때문에 술 못한다면서? 괜찮겠어?"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딱 한 잔만 사주시면 안돼요?" 그는 내게 스크루드라이버 한 잔을 시켜주었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거기다 많은 돈까지 벌게 됐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 전 존재가 뒤흔들릴 만큼 강렬한 전율을 느꼈던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술을 못하는 내겐 칵테일 한 잔도 취기를 가져왔다. "서원아. 봉급은 마음에 드니? 그 돈이면 네가 걱정하는 식구들 다 부양할 수 있겠지?" "그럼요. 저축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가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잘됐네. 널 도와줄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넌 대단한 사람이야. 보호받고 살아야 할 환자가 오히려 가족을 부양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거든. 진흙 속에 핀 연꽃이야, 서원 이는. 하느님도 네 순수한 영혼을 바라보고 계실 거야. 그러니 힘 내." 그가 해주는 격려의 말이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칵테일 한 잔의 취기가 온몸으로 퍼져갔다. 당신을 더는 작은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어요. 그런 외침만 비명처럼 내 가슴을 비집고 나오려 할뿐이었다. 사랑의 세계를 모르던 나에게 갑자기 열린 사랑의 문은 거대하게 달려드는 빛의 덩어리였다. 그 강렬한 빛 앞에서 나는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내 영혼의 방으로 은밀하게 숨어든 그를 어찌해야할 지 나는 정말 두렵기만 했다. 내가 디자인한 완구 샘플을 보고 수출계약이 성사됐다는 연락이 왔다. 전적으로 완구 디자인에만 매달려야 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돼준 꽃가게를 그만둬야 할 때였다. 꽃가게 사장에게 그간의 일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숨은 재주꾼이었구먼." 사장은 섭섭해하면서 그 동안 일한 돈을 계산해 주었다. "죄송합니다." "더 좋은 일 하러 가겠다는 데 막을 수 있나. 축하해줘야지. 그나저나 그 친구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가 박양만 뺏기고 말았구먼. 아무튼 잘 됐어요. 그렇다고 발 딱 끊지 말고 시간 나면 놀러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부신 한여름 햇살이 너울거렸다, 가로수 잎이 바람에 흩날리며 보도블록 위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출렁이는 빛과 그림자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넌 사랑에 빠졌어. 세상에서 말하는 금지된 사랑에 빠졌어. 내가 밟는 보도블록들이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온몸이 붕 뜨는 것 같지? 왜 날개를 펼치며 푸른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같지? 여자의 몸을 가진 나를 부인하고 여자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어 안달했던 내가 보였다. 저주해왔던 내 속의 여자가 몸 속 어디선가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여자인 너, 금단의 열매가 얼마나 달콤하고 쓰라린지, 그 길로 가봐. 내 발걸음은 그렇게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작은아버지에게선 전화가 자주 걸려왔다. 그러나 바쁜 것인지, 아니면 그날 내 눈물 속에서 위험한 징조라도 읽은 것인지 좀체 만나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내 건강을 묻는 일상적인 안부전화였다. 잠 못 들고 뒤척이던 어느 날 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더 이상 작은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는 그 누구도 사랑할 줄 몰랐어요. 사랑은 흐르는 물을 막는 둑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가슴에 둑을 무너뜨릴 사랑이 자라고 있는 줄 저도 몰랐어요. 이제 둑을 넘어 흐르는, 여자된 자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절대 여자로 발효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저는 이제야 제 길을 찾아 달그락거리며 항아리 가득 포도주를 담글 준비를 합니다. 제가 담근 포도주를 드실 수 있겠습니까? 어린 여자인 제가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하세요.' 등기로 편지를 보내놓고 나는 미친 짓이야, 좁은 방을 서성이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러면서도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온통 전화기에만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전화기는 두꺼비처럼 하루종일 침묵이었다. 시계만 쳐다보다 하루가 가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전화기가 고장난 게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번 수화기를 들어보았지만 무심한 송신 음만 뚜뚜 귓가로 아프게 흘러들었다. 짤막한 안부라도 물어주던 전화가 얼마나 귀하게 여겨졌는지 모른다. 연인이 아니라 작은아버지라도 제발 전화를 해주었으면…. 과도하게 신경을 쓴 탓인지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방문이 살아 숨쉬며 부풀었다 줄어들곤 했다. 환각은 점점 심해져서 방안의 사물들이 움직이고 웃고 숨을 쉬었다. 죽어 있어야 할 것들이 살아 숨쉰다는 것은 정말 끔찍했다. 환각이야. 스스로에게 그렇게 타일렀지만 머리털이 곤두서는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내 몸의 세로 하나하나가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듯했다. 그랬다. 사랑은 그리움이었다. 그리움 속에서 나는 뭔가 풍요롭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내 자아가 소멸되고 그 자리에 그가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황폐한 나를 채우고도 흘러 넘칠 만한 그가. 며칠 뒤 그토록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그 음성 어디에도 내 편지를 받은 듯한 흔적이 묻어 있지 않았다. 편지를 두 번은 받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편지 받으셨어요?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이 만났을 때도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도, 하느님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는 내 절망감을 치유해주었던 그 자애로운 눈빛이 이제는 내 가슴을 예리한 칼날처럼 도려내고 있었다. 그 앞에서는 내 마음의 한 자락도 표현하지 못하고 돌아오면 혼자 그리움에 몸살을 앓다 사랑의 편지를 써 보내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지만 그는 바위산처럼 여전했다. 수신자 없이 다시 내게로 되돌아오는 그리움이 내 안에 쌓여갔다. 깊어 가는 내 그리움이 바위 같은 그를 녹여낼 수는 없을까. 매일매일 살아 숨쉬는 내 방안에서 공포에 휩싸여 나는 빌고 또 빌었다. 어느 날, 나는 그와 어느 카페에 마주앉아 있었다. 우리 사이로 아이리시 커피 향이 맴돌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빨간 촛불이 흔들리며 타올랐다. 카펜 안은 어두웠지만 그의 얼굴만은 보름달처럼 환하게 보였다. 그 환한 얼굴은 내가 도달해야 할 유일한 목적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다가가도 꼭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가갈 수 없는 그리움이 촛농처럼 눈물로 녹아 내렸다. 주변의 사물도 사람도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내 등을 토닥여 주지도 않았고 다정한 말도 건네 오지 않았다. 그저 내 얼굴에서 눈길을 돌려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완강하고 냉정한 옆모습이었다. 나를 비켜간 그의 시선이 서러워 나는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어두운 카페에서 숨죽여 얼마나 울었을까. 여느 때처럼 다정한 음성이 들렸다. "서원아. 그만 울어라. 나도 네가 좋다." 내 편지를 받으셨구나. 다 알고 계셨던 거야, 내 마음을.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철저할 수 있는 네가 부러워. 그런 네가 예쁘고 좋다. 너는 황무지에 서 너 혼자 집을 짓고 사는 아이야." 아, 나는 그에게 예쁘고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직도 나는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싫어요." 그래요. 당신에게 여자일 수 없는 내가 정말 싫어요! 그러나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네가 욕심이 많아서 그래. 완구 디자인도 너 혼자 아픈 몸과 싸워가며 해낸 거잖니? 스스로를 사랑하도록 해봐. 너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전 정말 하고 싶은 문학 공부를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걸요. 책을 읽으면 발작증세가 생겨요. 기를 쓰고 읽어도 한 달에 겨우 세 권밖에 읽을 수가 없어요. 책을 읽다보면 머리에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 사랑을 그렇게 투정으로나 풀어낼 수밖에. 이제 그는 내게로 시선을 돌려 언제 나처럼 자애롭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원아. 아직 나이가 있지 않니? 벌써 절망하면 넌 정말 욕심쟁이인 거야. 학벌 때문에 상처받은 것도 다 알아. 하지만 문학을 하는 데는 학벌이 필요 없단다. 연줄이 없어서 고생은 하겠지만 언젠가는 꼭 인정받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다." "그럴까요? 사람들이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물을 때마다 정말 난감해요. 사람들은 학벌로 사람을 평가하잖아요." "너, 가축처럼 길들여지는 게 싫다고 했지?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생각 못해.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모두 길들여져 살지. 그것이 편하니까. 너는 혼자 힘으로 세상과 부딪치면서 너를 만들어왔어. 온전히 너만의 것을. 나도 너 처럼 살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는 말을 끊고 오래오래 커피 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고개 숙인 그의 얼굴에 어딘지 어두운 그늘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할 듯 잠시 달싹이던 그 입이 굳게 닫혔다. 카페를 나올 때까지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향해 열린 내 여자의 문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 것일까. 하루 열 세시간씩 자야 발작을 면할 수 있는 기면증 환자인 나는 그 날밤 잠들지 못했다. 내 사랑. 키 큰 나무들 노을로 반짝일 때 두 팔 가득 카나리아 안고 달려와줘요 외투와 장화 같은 건 버리고 달려와줘요 낮 동안은 초생달처럼 태양에게 빼앗겨야 하는 당신, 내게로만 몰리는 따뜻한 안개가 되어줘요 이 저녁 백합이 시들기 전에 등잔으로 타오르는 내가 되게 해줘요 당신의 가슴은 백합꽃들의 떨리는 바다 같아 한 마을을 뒤덮고도 쌓이는 흰 눈 나라 같아 나는 함부로, 함부로 당신에게 침범할 테요 때가 되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잉태를 하듯이 당신은 그런 내 모습에 소스라치겠지요 아아, 그래요. 나도 놀라 소스라칩니다 그걸 잊고 있었다니 내 사랑. 이젠 아침의 태양이 당신을 세상으로 보내도 나는 언제나 홀로인 대낮의 치욕을 견디겠어요 노을이 다시 창의 커튼을 바람처럼 흐트려놓을때 젖은 머리칼을 말리며 노래하는 카나리아 되고 있겠어요 내 뺨을 박하 향으로 불 피워놓고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지옥에서 보낸 한 철 1년이 가도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에게 나는 의형제를 맺었던 고향 형님의 딸일 뿐이었다. 내가 고집스럽게 그를 향한 외사랑을 거두지 않듯 그 역시 나를 고집스럽게 예쁜 아이로만 대했다. 잠시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울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 그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향한 마음을 잠재우려는 안간힘인 걸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면 내 고통의 반은 덜 수 있었을 텐데…. "서원아. 나도 할 얘기가 있단다." 만난 지 1년이 가까워오는 어느 봄날이었다. 심각해지는 그 목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제 그만 만나자고 하는 건 아닐까. 잘못했어요. 그냥 이대로라도 제 곁에 머물러주세요.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을게요. 그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스쳤다. 내 얼굴이 얼마나 겁에 질려 있었던지 그가 진지한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그렇게 놀라니? 별얘기도 아닌데. 늘 그렇게 긴장해서야 세상을 어떻게 살아내겠어. 그러니 늘 아프지. 내 어머니 얘기야. 이런 얘기 한 번도 안 했었지? 난 낳아준 어머니와 키워준 어머니가 달라." 그를 키워준 어머니는 **대학교 창립자였다. 우연히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섯 살배기 고향 아이의 영특함에 반해 친부모의 허락을 받고 아이를 서울로 데려왔다고 한다. 그 다섯 살배기 사내아이가 바로 그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양어머니는 독신이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그를 키우며 살아온 것이다. 그는 원래 문학에 뜻이 있었다. 하지만 양어머니는 의대를 권유했다. 그는 작은 상처에도 진저리를 치는 사람이었다. 의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피 한 점 섞이지 않은 아이를 데려다 친자식보다 더 정성껏 키워온 양어머니의 요청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타협 끝에 선택한 것이 법대였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그리 따뜻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까다롭고 결벽증 같은 게 있는 사람이지. 그런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 바로 양어머니였다. 힘이 들 때면 늘 그분을 생각하곤 하지. 나를 똑바로 세워주는 지렛대 같은 분이라고나 할까." "아니에요. 얼마나 따뜻하신 데요. 그렇지 않다면 저 같은 아이를 이렇게 품어 주셨겠어요?" 그는 조용히 웃으며 오래도록 나를 바라보았다. 그 미소에 쓸쓸함이 배어 있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을까? "글쎄다. 내가 정말 너를 품을 수 있는 그릇인지 모르겠구나. 요즘 부쩍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는구나. 편찮으셔서 그런 건지…." 그를 작은아버지로 대할 수는 없었지만 내 마음이 어떻든 그 사람 곁에 머물러 있을 수만 있다면 우리 관계가 어떤 것이어도 좋았다. 그가 함께 있으면 모든 세상일을 잊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결핍된 사랑까지도 다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나는 병들고 소외당한 육체가 아니었다. "제발 안 본다는 말만 하지 마세요. 그것만 아니면 다른 건 뭐든지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그의 따스한 손이 내 뺨으로 다가왔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서원아. 그러지 말아라. 나를 좋아해서는 안 돼."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좋은 건 아마 네가 못 느껴본 아버지의 정 같은 걸 거야. 나를 그렇게만 생각해라. 네 젊음이 나 때문에 망가져서는 안돼. 나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너보다 스물 두살이나 많은 늙은이야. 너를 받아들이고 나면 나는 평생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게다. 나는 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내 뺨에 와 닿은 그의 손은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저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저를 사랑해주시기만 하면 안 되나요? 그냥, 그냥 지금처럼 제 곁에 있으면서 저를 사랑해주시면 안 되나요?"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너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그날 이후 한동안 그는 연락이 없었다. 그를 영영 잃는 것은 아닌지 매일매일 몸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의 목소리, 웃음, 눈빛, 모든 것이 그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재발한 두통은 끔찍하고 끈질겼다. 두통 약을 몇 알씩 삼켜도 소용이 없었다. 물에 적신 수건을 냉동실에서 꽁꽁 얼려 머리에 얹어도 보고 아예 냉동실 안에 머리를 넣어보기도 했지만 두통은 그를 향한 그리움처럼 끈질겼다. 하는 수 없이 또다시 신경안정제를 복용했다. 나는 일을 해야 했고 일해야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기면증은 잠들 때와 깰 때 특히 고통스러웠다. 호흡장애와 경련까지 겹쳐 잠에서 깨어날 때면 차라리 내 육체가 사라졌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그런 나를 견딜 수 있게 해 준 건 그래도 그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그가 내게 연락하지 않으면 나로서는 그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연락처는 학교였다. 그러나 학교는 방학중이었고 나는 그의 집 전화번호조차 알지 못했다, 그가 어떤 집에서 어떤 사람들과 사는 지도 몰랐다. 혹 연락이 올까 전화통을 끌어안고 살면서 그의 부인은 어떤 사람일지 아이들은 누구를 닮았을지 상상하곤 했다. 질투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 속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싶었다. 부인이든 자식이든 그에게 속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에게 소중한 것이라면 나도 그만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사랑을 허락만 해준다면…. 뜨거운 여름햇살이 채 시들지 않은 초저녁이었다. 무심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그 였다. 여자의 직감일까. 그 무렵 나는 전화벨 소리만 듣고도 그의 전호를 가려낼 수 있었다. "… 나다." 막혔던 그리움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좀 만날 수 있을까?" 몇 달 동안 그의 전화만 기다려왔던 나는 정신없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를 보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까맣게 야윈 얼굴. 어두워지는 가로수 그늘 밑에 앉아 그는 울고 있었다. "어머님이 병원에 계셔. 위독하시다. 찬송가 카세트를 사다 달라고 하셔서 잠시 나왔어." 그랬구나.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앞두고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나는 그를 잃을까봐 그것만 애태우고 있었구나. 앞 뒤 가릴 줄 모르는 내 이기적인 욕망이 부끄러웠다. "미안해요. 선생님은 어머님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저는 제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뜨겁게 내 손을 움켜쥐었다. 나를 받아들이시는 거구나. 그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사랑을 얻은 나는 날아갈 듯 기뻤다. 욕망이란 선악의 분별도, 양심도 없는 것일까. "서원아. 때로 나는 네 진실한 욕망이 부럽단다. 나는 누구를 진실로 사랑해 본 적이 없어. 키워주신 어머님을 사랑했던 것 외에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네가 첫사랑이야. 네 생각 많이 했다. 혼자 가만있으면 문득문득 네 생각이 나더구나." 지옥에서의 내 한 철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것 아닌 그의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나 가깝게 들려왔다. 그 심장소리가 내 가슴으로 스며들어 나와 하나가 되고 있었다. 하느님. 제발 이 행복만은 거두지 말아주세요. 더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의 아내가 되기를 꿈꾸지도 않고, 그의 전부를 가지려 욕심 내지도 않겠습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한낮의 열기가 가신 바람은 상쾌했다. 별이 돋을 시간이었다. 밤하늘에도 내 마음에도. 나는 행복하네 언제나 하늘이었던 하늘 날짐승과 들판 신에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처럼 창백한 나무들 나는 행복하네. 그토록 불행으로 멀었던 눈 덮어두고 언제나 푸르렀던 푸른 강물 어둠과 반짝이는 연어떼 두려움은 실루엣처럼 길이 되고 나도 연어가 되어 분홍빛 살 흔들며 분홍빛 자꾸만 따라가 내 자궁이었던 그곳 하늘이었던 하늘 솔밭이었던 솔밭 나는 행복하네 그는 늘 먼 곳에 오후 세 시. 완구 디자인을 하고 있던 나는 이상한 전율에 몸서리쳤다. 돌아가셨구나. 그의 유일한 기둥이던 어머니가 하느님 곁으로 돌아가셨구나.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확신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 드렸다. 정확하게 나흘 뒤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완전히 탈진 상태였다. "장례는 잘 치르셨나요?" "어떻게 알았니?"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가 말해주지 않으면 나로서는 그에게 생긴 일을 알 수 있는 어떤 통로도 없었으니까. "6일날 돌아가셨죠? 오후 세 시쯤." "어떻게 알았니?" "몰라요. 그냥 그 시간에 이상한 떨림이 왔어요." "신기하구나." "저도 모르겠어요. 제 신경이 남보다 특별히 예민해서 특별한 것을 느끼는 지도 몰라요. 제게는 티슈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는 걸요." "티슈 떨어지는 소리라니?" "무슨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티슈가 한 장 떨어져 있는 거예요.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저 혼자 듣는 거죠." "너는 조금만 때려도 크게 울리는 북 같겠구나." 어미니 장례를 치르느라 해쓱해진 그의 뺨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올랐다. 늘 도움만 받아왔던 내가 그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냄새는? 냄새도 잘 맡니?" "그럼요. 냄새도 먼저 맡아요. 최루탄이 터지면 저는 남보다 1시간 먼저 재채기를 해요. 제가 어딘 선가 최루탄이 터졌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어요. 나중에야 어떻게 알았냐고 들 묻죠." "그럼 뭐라고 대답하니?" "왜들 그렇게 둔하냐고 그러지요, 뭐." 그는 입을 벌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보다 열 배는 더 큰 웃음이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욕심 많은 나는 그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하고 싶었다. 아무 것도 원치 않겠노라고 약속해놓고도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자주 그늘이 드리우곤 했다.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망연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보면 안타까웠다. "부모의 죽음을 천붕이라고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구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막막함. 정말 그것 말고는 어떻게 표현할 재간이 없네. 어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 하늘이 무너진 듯 막막하고 아득해." 내겐 당신이 그래요. 당신이 없으면 그렇듯 막막하고 아득할 거예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어머니를 잃고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우리는 부쩍 자주 만났다. 내 사랑은 십년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대지 같았다. 순식간에 단비를 빨아들이는 메마른 대치처럼 사랑에 굶주린 내 마음은 사랑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 사랑에 기갈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병마에 시달리는 내가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만나기만 하면 내 병세부터 묻는 게 습관이 되었다. 전날 발작이라도 했다는 말을 들으면 벌써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많이 아팠니? 발작을 하면 도대체 어떤 고통이 오는 거지?" "심할 땐 전기고문을 받는 것 같아요." 자신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듯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힘주어 내 손을 잡았다. "그럴 땐 약이 없는 거니? 약을 먹어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 거야?" "네. 참는 게 약이죠, 뭐. 참, 요즘엔 약이 하나 생겼어요." "뭔데?" "선생님이요. 선생님을 생각하면 아프지 않아요." 그러면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돌았다. 내 일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내 병에 관심을 갖고 배려해 준 적이 없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간질처럼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져 잠에 빠져드는 기면증은 내게는 치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오직 그 사람만이 내 치부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었고 그 사람 앞에서는 나도 거침없이 내 치부를 드러낼 수 있었다. 때때로 점잖은 그도 내 앞에서는 천진스런 소년이 되곤 했다. "정말 내 생각을 하면 아프지 않아?" 그렇게 묻고는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 표정이 아름다웠다. "그럼요. 요즈음 발작하는 횟수도 많이 줄었는 걸요. 선생님 덕분이에요." 여전히 홍조를 띤 채 그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 속에 행복에 달뜬 내가 있었다. "어쩌다 나한테 그렇게 됐니?" 그의 손이 내 얼굴을 향해 건너오다 중간에서 엉거주춤 멈춰졌다. 그의 이성이 저절로 넘쳐흐르는 사랑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우리는 거침없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이의 뺨을 어루만져서는 안 되는 슬픈 연인이었다. 그를 만나면서 나는 인간의 육체가 왜 존재하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던 밤마다 더럽다고 부정해왔던 육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 나는 그의 영혼만이 아니라 그의 육체도 그리웠다.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었고 가슴에 안기고 싶었고 그만의 독특한 체취를 호흡하고 싶었다. 눈가에 굵게 접힌 세 개의 주름, 유난히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 그의 몸 구석구석을 알고 느끼고 겪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한다고 해도 나는 그의 전부를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었다. 스물 다섯, 세상을 우습게 알던 나에게 세상의 도덕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 속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그에게 손을 내밀 수 없었다. 당신도 나처럼 세상의 도덕을 뛰어넘어 달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나마 행복마저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가 나의 남자라는 사실이 내겐 믿어지지 않는 꿈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 얼굴을 보면서 도 그 얼굴이 새롭고 신기하고, 그 영혼의 한 부분이 내게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 나날이 신비로웠다. 서로 육체에 손댈 수 없다는 사실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의 손길이나를 향해 다가오다 문득 멈출 때, 그의 빛나는 미소를 어루만질 수 없을 때, 순간적인 감정에 이끌려 무심코 손을 잡은 그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돌아볼 때, 날카로운 사금파리들이 내 가슴속에서 아프게 서걱거렸다.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면서도 나의 남자, 그는 늘 그렇게 멀리 있었다. 어느 날 헤어질 무렵이었다. 샌들굽이 덜그럭거리기 시작했다. 나사못이 풀렸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가 조금씩 심해지는 게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구두 수선 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라. 그래. 저기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면 되겠다." "왜요? 어디 가시려고요?" "응. 잠깐만 기다려. 금방 올게."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그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골목길로 내달리더니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뛰어가다가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닐까? 골목에서 오토바이와 부딪치기라도 한 건 아닐까?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갈 무렵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왔다. 꼭 한 시간 만이었다. 손에는 본드가 들려 있었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구두굽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었다. "이 동넨 문방구가 하나도 없네. 간신히 샀어. 자 이걸로 대충 붙여보다." 주위의 이목 때문에 손도 잡지 못하던 그가 벤치에 앉아 있는 내 구두를 벗겼다. 8차선대로 옆이었다. 수그린 목덜미에 송송 땀이 배어 있었다. "괜찮은데…." "예민한 네가 얼마나 신경에 걸리겠니. 나 같은 사람한테도 거슬리던데. 이렇게 라도 붙이고 가는 게 낫지." 그를 홀로 사랑하던 1년은 백년처럼 길었는데 함께 사랑한 1년은 순간처럼 짧았다. 그를 만나 재잘거리는 틈에 어느 사이 또 다른 여름이 훌쩍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 무렵이었다. 완구회사 사장이 바이어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다. 일이니까 당연히 응했다. 다음엔 나 때문에 수출 주문이 늘었다며 감사 표시로 저녁을 사겠다고 해서 또 응했다. 그 뒤로 사장이 가끔 안부전화를 걸어왔다. 완구디자인으로 난생 처음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하고 있을 때였다. 가능하면 저녁식사 제의를 거절했지만 매번 그럴 수만도 없어서 난감하기 짝이 없는 저녁 약속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에 대한 사장의 관심은 갈수록 더해갔다. "서원 씨는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군요." "별로 말할 게 없어서요." "저에게 왜 그렇게 거리를 두는 겁니까? 제가 그렇게 싫습니까?" "함께 일하는 분과 이렇게 저렇게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비즈니스에 감정이 섞이면 일이 꼬이게 되잖아요." "일로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지금 누구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늦었는데 그만 가시지요." 그렇게 정중하게 잘랐는데도 서른 둘의 독신인 사장은 여간해서 물러서지 않았다. 사장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그에게 사장이나를 좋아해서 일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러잖아도 그는 틈만 나면 말하곤 했다. "우리 편하게 생각하자. 나에게 너무 얽매이지 말고 네 또래 젊은 남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져봐. 언제라도 네가 행복을 찾아 떠난다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보내줄게. 나를, 네가 진정한 반려자를 찾을 때까지 잠시 너를 돌봐주는 징검다리라고 생각해라. 네가 잠시 내 옆에 머물러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평생 행복할 거야." 그런 사람에게 미혼인 사장이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장의 구애는 점점 더 심해졌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발작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뭔가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재미있고 돈벌이도 괜찮은 일이었지만 내게 허락된 행운이 다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여름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무슨 얘긴가를 종달새처럼 종알거리고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서원아. 내가 너에게 줄 게 있는데 꼭 받아야 된다." "또 무슨 선물이에요? 저 만나면서 돈 너무 많이 쓰셨잖아요." "이건 좀 달라. 네가 꼭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저에게 편지 쓰신 거예요? 정말이요?" "그게 아니고 내가 널 위해서 1년 동안 적금을 부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 내지 말고 받아주기 바란다." "저 먹고살아요. 선생님이 일자리도 마련해 주셨잖아요. 덕분에 저금도 하는 걸요." "알아. 그저 뭔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랬어. 얼마 되지도 않아." "받을 수 없어요." 그의 눈길이 그윽하게 내 눈에 닿았다.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렴. 다달이 적금을 부을 때마다 이게 너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기분이 좋았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기쁨을 위해서였어. 받아주렴." 나는 봉투를 열어보았다. 500만원 짜리 수표였다. 나를 만나느라 저금 통장도 바닥이 났으리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교수가 버는 돈이란 게 뻔할 텐데 강의를 늘려가며 적금을 부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난 학기엔 야간강의를 하느라 잘 만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밖에 못해 주는 거 용서해라. 마음 같아선 네가 아무 일도 안하고 글만 쓰게 해주고 싶지만…." 귀한 돈이었다. 피 같은, 내게 주는 그의 마음이었다. "너도 적금 부었으니까 합쳐서 조그만 분식 집이라도 차리면 생활이 빨리 안정될 거야. 그렇게 가족들 생계를 마련해놓고 너도 문학에 전념해야지." 그는 또 활짝 웃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미소. 눈가에 접히는 잔주름. 아직도 그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환히 보이고 느껴진다. 나 같은 여자를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로 여겼던 사람, 머리카락 한 올도 거짓을 모르는 여자라고 그렇게도 나를 믿고 사랑했던 그 사람. 나는 완벽하게 그의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한없는 자기 사랑을 보여만 주고 늘 저 만치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외딴 우리들의 방 낙엽이 지는 가을에 사랑은 더욱 깊어가고 흰눈이 내려 쌓이는 겨울이 왔다. 그의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데 갑자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마비가 오려는 전조였다. 병에 익숙해진 나는 이제 예전처럼 무방비 상태로 쓰러지지만 은 않았다. "선생님. 몸이 이상해요." 저녁을 먹고 호텔 바에서 필리핀 여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을 때였다. "빨리 가야겠어요." 서둘러 일어났으나 내 다리는 이미 말을 듣지 않았다. "병원에 가야 되니?" 내 발작을 처음 보는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한 눈치였다. "아…뇨. 마비…가…풀릴…때까지…" 혀가 굳어가고 있었다, 팔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들쳐업었다. 사람들은 내가 술에 취한 줄 알았을 것이다. 바에서 나오니 음악소리가 사라지고 밝은 조명이 눈을 찔렀다. 그의 등에 업혀 어디론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침대에 눕혀진 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뺨을 타고 눈물만 주르르 흘러내렸다. 정말이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내 마비는 풀리지 않았다. 혀만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시예요?" "새벽 1시야. 괜찮니?" "먼저 가세요. 혀가 풀렸으니까 팔다리도 곧 풀릴 거예요. 너무 늦었어요. 저 혼자 갈게요. 제 걱정 마시고 먼저 가세요. 내일 강의 많은 날이잖아요." "이런 널 두고 어떻게 혼자 가니?" 원래 그는 초저녁잠이 많은 사람이었다. 늦어도 밤 10시쯤엔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그래서 우리는 주로 낮시간에 만났고 밤에 만나도 대개는 10시 이전에 헤어졌다. 내 발작에 놀라 잠도 달아났는지 그는 내 곁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그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무토막처럼 굳어있는 내 모습을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가 그만 가주었으면 싶기도 하고, 난생 처음 들어와본 낯선 호텔 방에서 나 혼자 버텨야 할 시간이 무서워서 가지 않는 그가 고맙기도 했다.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2시가 지나서야 팔 다리에 피가 도는 느낌이 왔다. 드디어 마비가 풀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화가 치밀자 호흡이 다시 가빠왔다. "왜 그래? 심장이 또 이상하니?" "물 좀 주세요." 그는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컵에 따라주었다. 단숨에 마셔버렸다. "저를 사랑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고통받아요." "난 괜찮다." "세상에 건강하고 좋은 여자들 많아요." "서원아. 그러지 마. 너 자신을 사랑해야 돼." "쓰러져서 선생님 망신 줬잖아요.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요."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고불고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땅속에서 부글거리던 용암이 화산으로 폭발하는 듯한 분노였다. 천형을 안고 태어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나는 통제력을 잃었다. 머리를 벽에 쾅쾅 박았다. 그는 나를 말리느라고 이리 붙들고 저리 붙들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는 제풀에 지쳐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정신을 잃을까 걱정스러운지 내 눈동자를 살펴보았다. "난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 나는 대꾸 없이 가만히 있었다. 다시는 날 안 만나겠지. 이런 절반 병신을 누가 사랑하겠어. "날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거지?" 나는 아직도 그때 그가 한 말의 그 부드러운 억양, 깊은 이해와 사랑이 담긴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한다. 그 말은 시원을 거쳐 내 존재의 근원 자체를 뒤흔들었다. 나는 그의 목을 확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서원아. 떠나지 않을게. 네가 용서해 준다면, 네가 나를 받아준다면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 게." "선생님. 아파요. 너무나 아파요." "날 생각하면 덜 아프다고 했지. 나도 사랑한다. 널 사랑해." 그의 입을 통해 처음 듣는 사랑고백이었다. 드디어 강철같은 이성의 문을 뚫고 마음 깊이 숨겨진 뜨거운 영혼이 솟구쳐 오른 것이다. 새벽 4시. 파랑새가 날아올랐다. 찌르찌르와 미찌르가 파랑새를 가지고 왔다. 어디 갔다 이제 오니. 해와 달과 산과 들판을 지나 오솔길도 지나 좁은 골목길을 몇 바퀴 돌고 이제야 나를 찾아오는 거니. 벌목을 끝낸 숲으로 찾아오니. 하지만 아직 그 숲은 살아 있었다. 그와 나의 파랑새가 날아오르는 순간 벌목을 끝낸 황폐한 나의 숲에도 다시 푸른 이끼가 우거지고 작은 꽃들이 피어났다. 불모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아픈 내 육신에 황금빛 달이 담긴 냇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와 몸으로 하나가 되기 전까지 나는 정신적인 것만으로도 충족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몸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그 신비한 친밀감. 나와 타다가 하나로 일치하는 완벽한 충족감. 그것은 정신적인 유대를 끈끈하게 붙들어 매는 아교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를 통해 나는 진정한 여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나는 비로소 살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다. 병든 육체 때문에 죽고 싶다가도 그를 생각하면 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종교와도 같았다. 나 자신에게조차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내가 그 사람 앞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단 하나의 찬란한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면서 나는 여자가 되고,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둥지를 틀 우리만의 방이 필요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방이 필요해질 때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다른 여인의 남편.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방을 마련할 수는 없었다. 우리의 방을 가질 수 없는 관계가 전혀 서글프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그 슬픔이 우리 사랑을 방해할 만큼 큰 것은 아니었다. 숱한 사람들이 스쳐 가는 호텔 방이라고 해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나는 견뎌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곳, 그곳이 내게는 우리만의 방이었다. 침대, 소파, 소형 냉장고, 스탠드, 호텔 방의 그 모든 것들이 그냥 스쳐 가는 사물이 아니라 그와 함께 내 안에서 한껏 익혀내 기억 속에 유영하는 나만의 것이었다. 그 방을 드나든 사람들은 무수할 지 모르지만 내 방은 그들 기억 속의 방과는 전혀 다를 것이었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스며든 사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내 기억 속에 머물렀다. 호텔 방을 드나드는 중년의 신사와 젊은 여자. 누구나 그런 장면을 보면 불륜을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리는 따로따로 우리의 방을 찾아들어야 했다. 우리만의 공간에 단 둘이 있는 순간은 즐거웠지만 그 방으로 가는 과정은 언제나 슬프고 우울했다, 연회색과 초록이 뒤섞인 양탄자를 밝아 긴 복도를 홀로 걸으면서 내 마음은 착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아무 욕심도 내지 않겠다고, 사랑은 소유가 매번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호텔 복도를 홀로 걷는 그 시간 나는 숨겨진 여자임이 슬펐다. 숨겨져 있다는 것은 그에게 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가정이든 명예든. 부인과 내가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를 먼저 구할까, 하는 따위 유치하고 한심한 질문들이 불쑥불쑥 머리에 떠오르기도 했다. 그가 먼저 손 내미는 게 나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런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유치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거짓으로라도 나라고 대답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스쳐갈 당혹스러움이 싫었다. 나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먼 산이나 바라볼 어색한 순간이 싫었다. 그가 남을 의식하지 않는 건 오직 호텔 방에서였다. 커피숍이나 거리에서 그가 나에게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타인의 눈길을 한 순간이 나마 잊을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내가 옷깃이라도 스칠 때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는 그의 눈길 앞에서, 멈칫하는 그의 몸짓 앞에서 나는 천길 낭떠러지로 까마득히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방, 그곳에서 만큼은 그도 거리낌없이 다정했다. 그 무렵 그는 나와 만나느라 돈이 필요했다. 강의시간을 늘리는 것 외에 그가 돈을 마련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만나면 늘 피곤해 했다. 전날 야간강의라도 있었던 날이면 그는 아주 쉽게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잠깐의 천국을 잠으로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내 곁에서 평화롭게 잠든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내 작은 기쁨 중의 하나였다. 그의 숨결에 코를 대 냄새를 맞아보기도 하고 잠든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뛰는 소리도 들었다. 강하게 고동치는, 살아있는 심장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심장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소유욕을 뛰어넘는 것이 그토록 힘겨운 일일까. 잠든 그의 곁에서 나는 잠 못 이루고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소파 위에 놓인 그 옷가지들은 왜 또 그렇게 나를 서글프게 했는지. 하루종일 입은 와이셔츠는 이곳저곳 구김이 가 있었다. 구겨진 와이셔츠를 손으로 잡아 펴서 보기 좋게 개쳐 놓으면서 나는 그 옷을 내 손으로 하얗게 빨아 널고 싶었다. 새하얗게 삶아 빤 러닝셔츠를 야무지게 탁탁 털어 빨랫줄에 널고 싶었다. 그의 체취와 땀냄새가 뒤섞인 옷가지에 뺨을 묻은 채 나는 때로 상상의 나래를 폈다. 햇살 가득한 마당에 산들바람이 분다.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는 그와 내 옷들이 뒤섞여 걸려 있다. 빨래가 바람에 나부낀다. 햇살은 대청마루 깊숙이 스며들고 고즈넉한 가을볕을 받으며 나는 가계부를 쓰고 있다. 그는 가을 오후 곤한 낮잠에 빠져 있다. 그의 숨소리가 조용한 집안에 바람처럼 흐르고 있다.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참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결혼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잠든 그 사람 곁을 서성이거나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누워서 나는 제발 오늘만은 그가 오래오래 잠들어주길 바랐다. 단 하루라도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잊고 내 곁에서 곤한 잠을 자고, 함께 아침 햇살을 볼 수 있길 바란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깊은 잠에 빠졌더라도 아홉 시나 아홉시 반이면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는 시계부터 보았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시계를 보는 그를, 그의 등을 나는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아홉시 반은 내 마법이 풀리는 시간이었다. 왕자와 즐겁게 춤추던 신데렐라가 재 투성이 아가씨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가 잠든 동안 나는 매번 시계바늘을 돌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한 시간만, 아니 십 분이라도.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저 내가 바란 건 단 하루라도 그가 스스로 돌아갈 시간을 잊어주는 것이었지만, 그는 정확하고 분명한 사람이어서 그런 실수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다. 차라리 강의 준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 가야겠다 거나, 뭐 그런 식의 변명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입에 발린 달콤한 거짓말이라도 했더라면 나는 기꺼이 그 거짓말에 속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변명이나 거짓말은 못하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거짓말로라도 이혼하겠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듯이 부인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을 다른 병명으로 둘러댄 적이 없었다. 시간을 확인한 이후부터 그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했다. 그게 그가 나를 배려하는 방식이었다. 아홉 시쯤 눈을 뜬 그는 는 샤워를 했다. 자기만의 성으로,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내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샤워하는 물줄기가 내 마음에 통곡처럼 쏟아져 내렸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그의 몸에 닿았던 내 몸의 흔적들이 지워지면서 내 마음까지 지워지는 건 아닌지 매번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 사랑까지 저렇게 깨끗이 씻어버리는 건 아닌지 나는 집요하게 고개를 쳐드는 의심으로 몸부림쳤다. 그의 몸을 소유한 다음부터 더 큰 소유욕이 걷잡을 수 없이 나를 휘저었다. 몸이 마음보다 사람을 더 구속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예전 관계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침대 위에 떨어진 그의 흰 머리칼 하나까지 다 소유하고 싶은 내 욕망이 무서웠다. 잠에서 깨어나 각각 호텔 방을 나설 때까지 우리는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짧 은 꿈에서 깨어나 침묵하며 다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피곤했는지 거의 아홉시 반이 돼서야 잠에서 깬 그가 서둘러 방을 나가다가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그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침대에 앉은 채 도심의 불빛이 내려다보이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돌아서는 걸 나는 느꼈다. 제발 다시 돌아와주세요. 오늘만 나와 함께 아침을 맞아주세요. 그의 발소리 대신 짧은 한 마디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미안하다." 잠시 후 내 등뒤에서 문이 닫혔다.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바짓가랑이에라도 매달리고 싶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건 나의 선택이었다. 이래도 좋다고 사랑만 해달라고 먼저 매달린 건 나였다.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했던 나는 몰랐었다. 숨겨진 존재라는 게 이토록 참담한 것인지…. 그걸 알았다면 그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가 떠난 빈방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난 알았다. 더한 고통을 알았더라도 나는 이 참담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사철나무에 횃불 종이별처럼 오려놓아 나 당신 사랑해요 황혼을 타고 피는 백합 향기 나 당신 그리워 지독해져요 한 번 가면 오지 않는 날들도 파도울음으로 무릎 꿇으며 내 품에 안긴 당신이라고 믿어져 어디로 갔는지 묻고 싶지 않아요 내 살 속에 낳은 당신을 내 혼이 키워놓아 나 당신 내 것이라고 믿어요 둘만의 세상 그와 나는 평일에밖에 만날 수 없었다. 휴일이면 나는 늘 집에 틀어박혀 완구 디자인을 했다. 햇빛 맑은 날 텔레비전에 비친 서울 거리는 어디나 연인들의 물결이었다. 그런 장면을 보노라면 가슴 한편으로 서늘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온몸이 저려오는 한기였다. 귀나 머리가 먹먹해질 때도 있었다. 좁은 방안을 서성이다가 그가 없는 집을 견딜 수 없어 무작정 집을 나서곤 했다. 그래봤자 모두가 가족과 함께 하는 휴일, 친구도 없는 나는 만날 사람이 없었다. 동네를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찬거리나 몇 가지 사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내 손에 들린 찬거리는 우습게도 대개 그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병어 두세 마리나 더덕 따위가 담긴 비닐봉지를 덜렁거리며 집을 향할 때 나는 우습게도 혹 그가 와 있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헛된 희망이었다. 일요일 오후, 나는 그가 좋아하는 병어를 깨끗이 씻어 양념에 쟀다. "얘, 웬 병어니? 누가 좋아한다고?" 어머니의 핀잔을 들으면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사람을 위해 만든 내 요리를 먹는 건 동생이나 어머니였다. 늦음 점심으로 그가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한 일요일, 그의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나다. 일하니?" "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집일, 수화기 너머 내가 알지 못할 그곳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족의 눈을 피해 서재 같은 곳에서 전화를 하는 것이리라.. 수화기 너머의 그 고즈넉함이나를 더 슬프게 했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같은 생활의 자잘한 소리들이 들려왔다면 더 참담했을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수화기 너머의 고즈넉함이 현실이 배게된 우리의 불구 같은 사랑을 상징하는 것 같아 슬프고, 슬프다기보다는 두려웠다. "미안하구나." 그 말만 남기고 전화가 끊길 때도 있었다. 그런 날 그는 가족과 단란한 점심이라도 했던 것일까. 내 밥상에 올려진 병어구이가 그 집 밥상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내 상 위에 올려진 병어구이가 그지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 사람은 그 일요일, 내게 미안했으리라. 나와 나누지 못한, 결코 내 것일 수 없는 자신만의 그 행복들이. 정작 휴일날 만나지 말자고 제의한 건 나였다. 나는 그의 일과 가정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범하게 중매를 통해 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교수로서 충실했던 그에게 나란 여자의 출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법도 안에서 깔끔하고 성실하게 살아오던 사람을 고통스러운 사랑으로 끌어들인 건 바로 나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워준 것이다. 그와 함께 할 수 없는 휴일이나, 남인 듯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걸어야 할 때 내 마음에는 시린 바람이 불었지만 그런 일로 그에게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내가 선택한 사랑이었으니까. 천만 명이 산다는 서울도 그리 넓은 것은 아니어서 함께 있다가 그가 아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여러 차례였다. 2, 3미터쯤 간격을 두고 호텔 입구를 들어서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그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남이 듯 무심히 로비에서 서성거렸다. 카페에서 함께 앉아 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는 조카 혹은 제자인 듯 조신하게 인사를 해야 했다. 사람이 가고 나면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만난 지 세 번째 봄이 지나갈 무렵. 문득 그가 말했다. "이번 토요 일날 여행가지 않겠니? 1박 2일로." "정말이요?" 나는 아이처럼 들떴다. 그와 처음 하는 여행이었다. "어디루요?" "글세. 어디로 갈까? 가고 싶은 데 없니?" "몸이 아파서 별로 여행을 해본 적이 없어요. 선생님과 함께라면 전 어디든지 좋아요." "그래도 생각해봐. 이왕이면 서원 이가 가고 싶었던 곳으로 가게." "음…, 부여 어때요? 낙화암에 가보고 싶어요. 낙화암 가보신 적 있어요?" "있지." "거기 벚꽃 많아요?" "벚꽃? 벚꽃은 왜? 봄에 가본 적은 없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이상하게 낙화암을 생각하면 벚꽃이 떠올라요. 거긴 늘 슬픈 벚꽃 잎이 흩날리고 있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삼천 궁녀 얘기를 해주셨는데 그때 내 머리 속에서는 흰 벚꽃이 낙화암 위로 흩날리고 있었어요. 언젠가 봤던 장면처럼 생생하게요." 함께 할 여행에 들떠 이런저런 얘기를 종알거리다가 문득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부인이 떠올랐다. 갑자기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열시 가 되기도 전에 정확히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발버둥쳤으면서 정작 기회가 생겼는데 웬 변덕인지 몰랐다. "아니에요. 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왜? 몸이 안 좋니? 요즘 또 발작이 심해진 거야?" "아뇨. 가고 싶지만 그냥 미안해서요." "나한테? 뭐가 미안해?" "아니요. 사모님한테요. 일요일까지 선생님이 저하고 있으면 그 분께 너무 죄송할 것 같아요. 안 그래도 평일엔 저 때문에 늘 늦으셨잖아요.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긴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다 나를 더 미안하게 만드는구나. 언젠가 집사람이 네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네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며칠 뒤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묻더구나. 그 아이예요? 라고 밑도 끝도 없이 말이야.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지." 그의 부인이 보았다는 사진은 선생님과 제자처럼 나란히 서서 찍은 것이었다. 제자 중의 누군가와 사진을 찍었나보다 하고 보면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런 사진이었다. 게다가 그는 나를 만나는 몇 년 동안 내가 발작했던 날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외박을 한 것이 없었다. 그래도 십수년을 부대끼며 살아온 탓에 무엇인가 다른 징조를 읽었나 보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뭐라고 할 수 있었겠니, 나 같은 사람이." 나에게 너무 익숙한, 내가 나를 모멸할 때 짓곤 했던 자조의 웃음이 그의 얼굴에 번져나가고 있었다. 가슴이 쓰라렸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그렇게 스스로 괴롭히시는 거 정말 싫어요. 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 괴로워하지 마세요." 그의 입가에 떠오른 비틀린 웃음이 사라지고 대신 쓰린 고통의 그늘이 떠올랐다. "서원아. 내가 나쁘지? 내가 너무 겁쟁이지?" "아니요. 저를 사랑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선생님은 충분히 용감하신 거예요. 저 정말로 더 이상은 원치 않아요." 나는 그의 머리를 내 가슴에 끌어안았다. 가녀린 떨림이 전해져왔다. "이 바보야. 차라리 나를 원망하렴. 미워하고 투정도 부리고. 그래야 내가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안았다. 눈가에 눈물이 번져 있었다. "지금껏 남에게 죄짓지 않고 살아왔는데 너에게 큰 죄를 짓는구나." "울지 마세요. 제발 울지 마세요." 그 눈물이나를 감미롭게 슬프게, 그리고 불안하게 했다. 함께 울다 헤어진 그 주말, 우리는 부여로 여행을 떠났다. 봄의 여린 연둣빛이 진해지기 시작한 6월. 낙화암에는 벚꽃이 흩날리지 않았다. 비가 온 뒤끝이라 흙탕물 섞인 강물만 바위 아래로 굽이쳐 흐를 뿐이었다. 휴일이니 분명 낙화암 오르는 길이나 낙화암이나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텐데 이상하게 내 머리 속에는 단 한 사람도 만난 기억이 없다. 그의 팔짱을 끼고, 혹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길을 하염없이 걸었던 것만 같다. 오직 우리를 위한 공간인 듯 낙화암 일대가 텅 비어 있었던 것만 같다. 아는 사람이 없다는 안도감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무수히 오가는 사람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팔에 매달려 걸었던 낙화암 가는 길. 숨겨진 우리 사랑에도 그렇게 자유로운 한 때 가 있었다. 그 사람과 함께 온밤을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해서 그 날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약을 먹어도 잠이 오질 않았다. 아홉시 반이 지났는데도 그가 내 곁에 있었다. 열 두시가 지나고, 한 시가 지나도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이 행복도 끝이었다. 하느님, 제발 이 시간을 멈춰주세요. 단 하루만이라도. 그러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시계 초침이 미친 듯 달려가는 것 같았다. 덩달아 내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이 행복의 절정에서 죽어 행복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새벽 네시. 그가 잠에서 깨 나를 안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우리의 아침인가. 우리는 서로를 안은 채 동터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 하늘이 붉게 물들어오고 어둠에 잠겼던 방안의 사물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신선한 아침 햇살 속에 우리는 함께였다. 그토록 꿈꾸었던 아침을 맞으며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이 행복이 영원하길 바라는 욕심으로 내 가슴은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다시 타인으로 돌아간 그 10월에 접어들면서 그의 전화가 뜸해지기 시작했다. 부여로 여행가기 전 내 앞에서 흘렸던 그의 눈물이 마음에 걸렸다. 학교로 전화를 했지만 연락이 닿질 않았다. 조교에게 메시지를 남겼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보름만에 우연히 통화가 됐다. "저예요." 수화기 저편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저, 서원이라고요." "그래. 지금 일이 바쁘다. 내가 다시 연락하마." 그래놓고 또다시 함흥차사였다. 그를 처음 사랑하던 그때처럼 전화통 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자지러지게 전화벨이 울었다. 완구회사 사장이었다. "꼭 좀 뵈었으면 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사장의 전화를 받으면 심장부터 불안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지요." 사적인 만남은 이제 그만두겠다고, 일자리를 잃을 각오로 말할 작정이었다. "결혼해 주십시오." 만나자마자 사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밀고 나왔다. 사귄 적도 없는데 다짜고짜 결혼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농담 그만 하시죠." "농담 아닙니다. 결혼해 주십시오." "내가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잖아요." "다 알고 있습니다. 김교수께 여쭤 보았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경증으로 고생한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약 먹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말 두 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나는 컵에 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앞에 앉아 있는 사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나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분이었는데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까지 생겼으니 그의 마음을 짐작할 만했다. 난 당신 없으면 못 살아요. 안돼요.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은 소리가 입 밖으로 크게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안 된다구요?" "누가 김교수님한테 의논하라고 했어요?" 나는 따지듯 다그쳤다. 내막을 모르는 사장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원 씨가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으니 어쩝니까? 서원 씨를 소개해 준 작은아버님께 여쭤야지요.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겁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사장을 탓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나는 가방을 집어들고 미친 듯이 커피숍을 뛰쳐나갔다. 택시가 빨리 오지 않았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뒤따라온 사장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사실 사장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관계가 문제였을 뿐. 사장은 소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내가 서원 씨 몰래 서원 씨에 대해 알게 돼서 기분 상했어요? 그렇다면 미안합니다. 사 과 드릴게요. 하지만 저를 피하지만 말고 좀 만나주십시오. 김교수님도 아시지만 저 그렇게 한심한 놈 아닙니다." 택시는 좀체 오지 않았다. 속 모르는 사장은 곁에서 주절주절 끝없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말을 쏟아 붓고 있었다. "오래 생각했습니다. 김교수님이 재차 확인하시더군요. 건강상태가 그런데 괜찮겠느냐고. 자신 있느냐고." 사장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했던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죄없는 사장에게 화가 치밀었다. "서원 씨. 알다시피 난 고아예요. 아이 낳으라고 닦달할 시부모도 없고 시집살이 할 일도 없습니다. 눈치 볼 사람도 없다고요. 나는 서원 씨만 있으면 돼요." 내 입에서 고함이 막 터져나오려는 순간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와 멈췄다.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택시에 올랐다. 사장이 같이 타려고 했으나 있는 힘껏 그를 밀어버렸다. 중심을 잃은 사장이 바닥에 넘어졌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 문을 쾅 닫아버렸다. 마음속이 어지러웠다. 물건 팔아치우듯 날 결혼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내 의견이나 마음은 중요하지도 않다는 건가. 처음으로 그에 대한 미움이 내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집이 거의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문득 사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작은아버지가 돼야 했을 그의 처지가 떠올랐다. 병든 조카를 사랑한다는 건실한 청년 앞에서 그가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미움이 연민으로 다시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아저씨. **대학교로 가주세요." "돈암동에 다 왔는데요?" "알아요. 차 좀 돌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연구실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내 건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거리와 계단을 쉬지 않고 달려 연구실 문 앞에서 노크를 했다. "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열고 헉헉거렸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당황한 얼굴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았다. 내 거친 숨소리 때문인지 조교가 놀란 얼굴로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조카야. 앉아라. 뭐가 그리 급하니?" 그는 내가 무슨 일로 왔는지 다 아는 눈치였다. "차 드릴까요?" 조교가 물었다. "아니야. 나갈 거야." 그가 책상 정리를 하는 동안 숨을 고르며 기다렸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거센 불길이 내장을 다 녹여버릴 것 같았다. "나가자." 학생들이 우리 곁을 스쳐가면서 꾸벅 인사를 해왔다. 계단을 내려가 정문을 지나고 택시 를 탈 때까지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택시 안에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강의는 없어요?" "오후 늦게 있다. 몇 시간 여유 있어. 안 그래도 오늘쯤 전화하려고 했다. 갑자기 내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들었다. 한 달 전과 너무나 달라진 음성, 나를 사랑하는 동안 그의 음성에 스며 있던 열띤 기운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빛 한 줄기 새어들지 않는 깊은 바다 속에 잠긴 듯 세상 전부가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가 늘 찾아들던 호텔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안지는 않았다. "서원아. 화 내지 말고 일단 내 말을 들어보렴. 지난 한 달간 여러모로 많이 생각해보았다. 내 말대로 하자. 그게 너를 위한 길이야." 무한대의 압력이 내 몸을 짓눌러 나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난 너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너와 살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너와의 미래를 꿈꿔보지 않은 게 아니야. 하지만 어쩔 수가 없더구나. 나는 너만큼 헌신적으로 열정적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보다. 한평생 나를 바라보고만 있을래? 이렇게 늙어 가는 나를 바라보고만 있을래? 그건 너에게 너무 큰 죄를 짓는 거야…."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섣불리 너를 사랑한 게 후회스럽다. 너를 생각하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되돌리는 게 좋지 않겠니? 강사장. 참 괜찮은 사람이다. 네 짝으로 그만한 사람도 없어. 그 사람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게다…." 그의 음성이 아련하게 멀어져갔다. 호텔 창밖으로 달리는 차량들의 소음도, 방 깊숙이 스며든 가을햇살도, 그리웠던 그의 얼굴도 모두가 사라져갔다. 발작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쥐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서원아! 서원아!" 내 이름을 외치는 그의 음성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만 생각하면 어두웠던 골목도 환하게 밝아지던 나날들. 전화로 목소리만 들어도 사방이 빛으로 가득 차던 방안. 당신이라는 태양이 햇살을 거두자 나의 대지는 또다시 암흑이 된다. 은빛 날개로 하늘을 날아오르던 나, 검은 바람에 날개가 찢기고 추락하는 내가 보인다. 아득히 먼 곳에서 숨죽인 흐느낌이 들려온다. 추락하는 나의 울음인가? 당신의 울음인가? 내 안에 촛불을 밝히고 완구회사 사장에게 미안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당시는 그가 한없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사장은 우리 사랑의 방해꾼으로만 비쳤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이도 낳지 못하는 환자인 나와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그의 마음에도 무수한 연민과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해서 사장의 마음 같은 건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사랑이란 왜 그렇게 늘 어긋나기만 하는 건지. 이제 생각하니 그에게 정말 미안하다. 거절할 때 거절하더라도 상처까지 안겨줄 필요는 없었는데. 어긋난 사랑일지라도 저마다의 가슴속에서 자라는 모든 사랑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그때는 몰랐다. 가슴이 터질 듯한 내 사랑만 중요했을 뿐. 사장 때문에 그와 멀어지게 됐다고 생각한 나는 당장 완구 디자인을 그만두어버렸다. 어머니와 상의 끝에 커피숍을 차리기로 했다. 사장이 보내준 이익금과 그 동안의 저금, 그가 준 돈을 합치면 작은 커피숍을 차릴 만했다. 어머니에게 커피숍을 차려주는 것으로 나는 가족 부양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그만 해방되고 싶었다. 이젠 나도 내 갈 길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커피숍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동안 난 주머니 속에서, 500만원이 든 흰 봉투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난번 그가 준 돈이었다. 그 무렵에도 그는 간혹 안부전화를 걸어왔다. "건강은 괜찮니?" "글은 쓰고 있니?" 그의 입에서 보고싶다는 말이 나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가? "그래. 몸조심하고 잘 지내거라. 또 연락하마." 곧 전화가 끊기고 수화기에선 뚜뚜 신호음이 들려왔다. 오랫동안 나는 수화기를 그대로 귀에 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 뵙고 싶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는 잠시 망설였다. 나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를 가늠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찾지 않았다. 처음처럼 카페에서 스승과 제자처럼, 혹은 작은아버지와 조카처럼 만날 뿐이었다. 나는 흰 봉투를 내 밀었다. 그가 말없이 봉투를 열어보더니 다시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집어넣어라."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그동안 저 만나느라고 돈 하나도 없으시잖아요?" 커피를 한 잔 더 시켜 다 마시고 난 다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서원아. 아직도 난 너를 사랑한다. 평생 네 옆에서 너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택했을 뿐이야. 난 좋은 작은아버지이고 싶어. 친 작은아버지가 해주는 거라도 이렇게 거절 했겠니?" 그는 봉투를 내 핸드백에 직접 넣어주었다. "당분간 만나기 힘들 거야. 강의 시간도 늘고 하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당신도 나를 잊기 힘든 거지요?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미친 듯 일을 하는 거지요? 그렇게 힘든데 꼭 나를 떠나야 하나요?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 많은 질문들을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를 더 힘들게 할 것 같아서. "서원아. 사장한테서는 연락 없니? 난 네가 그 사람과 잘 됐으면 좋겠다." "사랑 없는 결혼을 하라구요?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함께 살라구요?" 나도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사랑이 있어야만 결혼생활이 편안한 건 아니다. 때로는 사랑이 서로를 망치기도 해. 그 사람,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참 좋은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다 받아주고 키워줄 사람이야. 그리고 지금은 네 마음이 나로 가득차 있어서 그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겠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세월이 지나면 그 사람이 너를 채워줄 거야." 팔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차로 데려가 주세요. 발작…이 시작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눕혀져 있던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안았다. "선생님. 북악 스카이웨이에 가고 싶어요. 데려다 주실래요?" 팔각정 있는 데까지 올라갔다. 나뭇가지마다 풍성한 잎사귀들이 여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 서울이 시원하게 바라보였다. 내 사랑처럼 거칠 데 없는 풍경이었다. 내 사랑은 그 무엇에도 거침이 없는데 그의 사랑에는 왜 그렇게 걸림돌이 많은 것일까.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인데 자꾸 눈 앞이 흐려졌다. "뭘 좀 먹자. 점심때가 많이 지났잖니?" 그는 북악터널 쪽으로 차를 몰았다. 아담한 목조건물 앞에서 차를 세웠다. 실내는 아늑했다. 메뉴를 정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베토벤의 비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채 수프가 나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수프를 떠먹었다. 굵은 눈물이 수프 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울면서 먹으면 체해." 그가 냅킨을 건네주었다. "다시는 날 예전처럼 사랑하시지 않겠지요?" 눈물을 참느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 매달린 갓을 쓴 알전구 빛이 눈동자를 파고 들었다. "어서 먹어라." 나는 초라한 내 모습을 감추고 싶었다. 내가 떠나서 그가 편해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머릿속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 같았다. 마루타처럼 해부 당하는 듯한 발작의 고통도 그를 보지 못하는 고통보다는 나았다. 이 세상 그 어떤 고통도 그의 미소를 볼 수 없는 고통에는 견줄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는 내 생명과도 같았다. 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내 몸에서 생명력이며 혼 같은 것들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손에 힘이 빠져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웨이터가 새 포크를 갖다 주었다. "가게는 정했니? 뭘 할 건지." "네." 화제를 바꾸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게 있니?" "커피숍을 하고 싶으시대요. 마땅한 장소를 찾아보는 중이에요." 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주문했다. 테이블은 넓고 통나무로 된 것이었다. 도끼로 내리찍어도 끄덕 없을 것 같았다. 주인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테이블을 구했을까 궁금했다.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얼굴에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테이블이 너 닮았구나." 그가 웃으면서 하는 말에 나는 눈을 흘겼다. "날 사랑하는 네가 안타깝구나. 내가 아니었다면 네 사랑이 훨씬 빛났을 텐데…." "아니요.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랑은 없어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사랑하는 그 순간 모든 사랑은 벌써 다 이루어진 거예요." "네가 부럽구나. 힘든 상황에도 어쩌면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건지. 하지만 서원아. 나 대신 문학에 매달려보렴. 그게 내가 살길이야. 문학이 너를 위로해주고 너를 성장시켜줄 거야." '당신 없이는 문학도 의미가 없는 걸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대답 대신 나는 나를 닮았다는 튼튼한 통나무 탁자를 문질렀다. 탁자엔 여기저기 손톱이나 예리한 무언가로 긁힌 듯한 흠집이 나 있었다. 흉하다기보다 흠집이 오랜 세월의 흔적처럼 느껴져서 한결 고풍스러워 보였다. "난 네게 이 탁자의 흠집 같은 것인지도 몰라. 세월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 그렇게 생각될 게다. 나로 인한 상처까지도 다 품어 안아서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됐으면 좋겠다. 서원아, 나랑 약속해주겠니? 나를 위해 열심히 습작을 하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다. "앞으로 내가 더 바빠질 거야. 만나기는 힘들겠지만, 전화는 하마." 그날 나는 우리 집 골목 어귀에 서서 멀어져가는 그의 회색 포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산동네 꼭대기에 있는 우리 집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내 손에는 팔각정에서 그가 사준 오렌지 주스 빈깡통이 들려 있었다. 나는 빈깡통을 깨끗이 씻어 내 책상 위에 엎어놓았다. 물기가 다 가신 뒤엔 책상 서랍에 넣었다. 내 책상 서랍은 우리의 추억들로 가득차 있었다. 낙화암 오르는 길에 먹었던 사탕껍질이며 껌종이, 빈 드링크 병까지. 어머니는 나보고 병이라고 했다. 그따위 걸 무엇 하러 모으느냐고. 어머니는 그런 것들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걸 물론 알지 못했다. 나는 그의 손길이 닿은 그 무엇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처음 그가 사준 드링크 병을 무심결에 쓰레기통에 버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내 시선이 그 쓰레기통 안으로 쏠렸다. 내 사랑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듯 마음이 아팠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거 아닐까?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마음 아프고 애잔해서 함부로 툭툭 털어 버릴 수 없는 마음, 사랑하는 이가 앉았다 일어난 자리에 남아있는 온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 사랑이란 그렇게 사소한 것들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믿도록 만든다. 그래서 사랑으로 인해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 각자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점점 더 멀어질 그의 뒷모습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날 밤 간절하게 하느님께 기도 드렸다. 그가 떠나가도 내안의 사랑이 홀로 충망할 수 있기를. 나는 내 안에 촛불을 켜고 소망의 배를 띄웠다. 그와 멀어지면서 나는 그렇게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악몽 속에 피어난 시 그를 위해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내게 그건 이별이 아니었다. 또 다른 방식의 사랑이었다. 그는 차츰 나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도 나처럼 그리움을 애써 참고 있을 거야. 전화가 걸려오지 않은 수많은 날들 나는 그렇게 위안을 삼았다. 그래도 견딜 수 없을 때면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집어들곤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화기를 들었다 내려놓곤 했다. 참다 못하면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때는 내게 속해 있던 반가운 그 목소리. 그러나 나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여보세요, 하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며칠은 견딜힘이 생겼다. 하루종일 그 목소리가 내 곁을 지켜주었다. 나는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그의 숨겨진 여자로 살 자신이 있었지만 그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떠나려고 하는 그를 떠나게 해주는 것도 사랑이라 나는 믿었다. 우리가 은밀히 나누던 슬픈 사랑을 이제 더욱 은밀히 내 안에서만 키워나갈 생각이었다. 5월의 눈부신 햇살이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내 검은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길처럼 따사로운 빛이었다. 지난해 부여에서 보았던 바로 그 봄햇살이었다. 그 무렵 나는 모든 것에서 그를 느꼈다. 모든 것이 추억으로 연결됐다. 길거리에서 은발의 신사만 보아도 그를 본 듯 가슴이 두근거렸고, 텔레비전에서 대학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와도 캠퍼스 안, 그의 방이 떠올랐다. 길거리에 있는 모든 호텔이 내게는 그와 내가 함께 있던 그 방을 연상케 했다. 그런 추억으로 나는 간 심히 지탱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인사동에 계약한 아담한 커피숍으로 가고 있었다. 실내장식과 소품 하나 하나를 모두 내가 고른 그곳은 내 일상을 꾸려 주고 또 우리 가족까지 부양해줄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보름 동안 공사를 한 뒤 6월 초 개업을 했다. 첫날 워낙 손님이 많았던 탓에 장사가 잘 될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주변을 다녀 봤지만 우리 커피숍같이 분위기 좋은 곳이 없었다. 내가 며칠 커피숍에 나가는 동안에도 제법 손님이 많았다. 나는 안심을 하고 어머니에게 가게를 완전히 맡겨버렸다. 나는 그와 약속한 대로 본격적인 문학공부에 매달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나를 괴롭히던 두통도 차츰 사그라든 덕분에 신경안정제도 그 양을 줄일 수 있었다. 그래도 잠을 충분히 자야 마비 증상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은 늘 촉박했다. 오후 내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가게로 나갔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손님이 줄어들었다. 커피 맛도 괜찮고 어머니도 장사를 못하는 편이 아닌데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보다 훨씬 후미진 골목에 있는 가게들이 장사가 더 잘 됐다. 한여름이 되자 아예 손님이 뚝 끊겼다. 나는 속이 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의 전 재산이 날아갈 판이었다. 가을이 돼도 손님이 늘지 않자 하루라도 빨리 손을 떼는 게 낫겠다 싶어 급히 가게를 내놓았다. 그러자 장사 안돼는 가게가 하루아침에 팔릴 리 만무했다. 나중을 대비해 뭔가 기술을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점토 학원을 다니면서 문화센터 시작 반에도 등록했다. 문학을 제대로 배울 필요가 있었다. 가게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주방장도 해고하고 차 나르는 아가씨도 한 명만 두었다. 대학 다니는 막냇동생과 내가 교대로 가게 일을 거들었다. 11월말. 가게가 팔렸으나 이미 돈은 다 까먹은 상태였다. 6개월만에 가진 돈을 다 날려버린 것이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원래 내 것이 아닌 돈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이었다. 그렇게 나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내 평생 가장 쓸쓸한 겨울을 맞고 있었다. 그 사람도 떠나고 돈걱정 없는 미래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막막한 어느 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려보면 나도 모르게 그에게 전화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낮고 굵은 목소리의 그 한마디를 듣고 나서야 옷을 차려입고 문화센터에 나갈 힘이 생겼다. 그래도 그가 먼저 전화를 하기 전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전화를 통해 전후사정을 알고 있던 그는 내가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일단 뭘 좀 먹자. 요즘 통 먹지도 못했지?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그는 내가 좋아하는 갈비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나를 위하는 세심한 마음이 사무쳐왔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면서 당신은 왜 나를 떠나려고만 하는 건가요? 목이 메 고기가 넘어가질 않았다. 그는 사이다를 시켜 마시게 하고 적당히 익은 고기를 내 수저 위에 자꾸만 얹어주었다. "평생 가족을 등에 지고 살아야 하는 게 네 팔잔 가부다. 요즈음 간혹 하느님이 원망스럽구나. 평생 싸워야 할 병에다가 가족까지… 어쩌자고 하느님은 어린 너에게 그 많은 짐을 지우신 건지 모르겠다." 자기가 얹어준 고기를 꾸역꾸역 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요즈음 나 때문에 네 인생이 더 고통스러워지지 않았나 싶어. 사장을 선택했더라면 편안했을지도 모르잖니? 그 사람 심성이 고와서 네 가족 외면하지 않았을 텐데 왜 기어코 나를 만나면서 이 고생이니, 서원아?" 그가 나를 여자로 품지 않게 된 후 완구 회사 사장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그도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또 모든게 자신의 탓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더니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미안하다. 더는 말 안 하마. 많이 먹어라." 나를 떠나려는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고, 그렇게 나를 생각하면서 떠나려는 그가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곁을 지켜주는 그 사람이 있다는 게 무엇보다 행복했다. 더 이상 그가 나를 여자로 안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가 곁에 있는 한, 내 인생은 살 만한 것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열심히 시를 쓰고 지점토를 배웠다. 스스로 살아 갈 길을 만드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것이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내 사랑의 전부였다. 지점토는 2년 과정이었는데 1년만에 강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나는 누드를 만들 줄 아는 몇 안 되는 강사 중 하나였다.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회관에서 한꺼번에 백명을 가르치기도 했고 대학생 서클을 맡기도 했다. 조금씩 돈이 벌리는 만큼 내 몸은 망가져갔다. 발작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나날이 야위어 가는 나를 보면서 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못 먹어서 걸린 병도 아닌데 그는 나만 만나면 고기를 먹이고 싶어했다. 그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한 발 물러선 것뿐이었다. 그의 사랑을 붙잡고 싶은 헛된 욕망 때문에 잘못 생각한 건지 모르지만 나는 어쨌든 그렇게 믿었다. 작은아버지로든 무엇으로든 여윈 나를 보고 근심하는 그 사람은 여전히 나의 연인이었다. 그가 내 곁에 있는 한 날려버린 전재산도, 혹독한 병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위해 살아내야만 했다. 겨울바람이 휘몰아쳤다. 산동네의 겨울 바람은 더 매서웠다. 겨울 냉기에 얼어붙은 듯 그의 연락도 뜸해졌다. 지점토 강의를 하러 가느라 좁고 구불구불한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다보면 덜 꺼진 연탄이 어느 집 대문 앞에 버려져 있곤 했다. 낮은 산동네 지붕을 돌아 휘몰아치는 겨우 바람 속에 연탄불은 쉽게 사그라들었다. 사그라드는 불꽃 앞에서 나는 좀체 발을 뗄 수 없었다. 오래 못 본 사이에 그의 사랑도 저 연탄불처럼 꺼져가고 있을 건만 같았다. 겨울방학이라 여보세요, 목소리만 확인하던 전화도 할 수 없었다. 가족들과 함께 따스한 방안에서 나를 까맣게 잊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의 사랑을 믿으면서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 앞에서 나는 춥고 외로웠다. 문학공부에다 돈벌이까지 무리를 한 탓에 발작횟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는 가끔씩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아주 가끔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보는 그의 눈에는 물기가 어리곤 했다. 그의 촉촉해진 눈가에 어린 눈물은 포근한 봄바람처럼 산동네 찬바람에 꽁꽁 얼어붙었던 내 마음을 녹여주었다. "이렇게 힘들어서 어떡하니? 내가, 내가 도와줄 일은 없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안쓰러워서 너를 볼 수가 없구나." 역시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깃털 하나의 무게도 그의 등에 짐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네가 문학 공부를 끝낼 동안만이라도 나에게 기대면 안 되겠니? 때로 예술가들은 후견인이 필요한 법이야." "싫어요!" 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그는 말을 그쳤다. 긴 침묵이 흘렀다. 이제 우리 사이엔 많은 대화가 오고가지 않았다. 무수히 오가던 말들이 끊긴 자리에 점점 더 긴 침묵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는 잘 써지니?" "요즘은 소설을 써보려고 해요. 소설 습작을 하고 있어요." "시에 전념해보지 그러니? 잘은 모르지만 내 생각에 너는 소설보다 시쪽인 것 같은데…. 시 쓰면 내게도 좀 보여주렴. 네 시를 읽고 싶구나." 나는 가방 속에서 며칠 전에 끄적거린 시를 꺼냈다. 내가 쓴 게 정말 시인지는 나도 자신이 없었다. 기성 시인들의 시와는 너무 달라서 이렇게 써도 시가 되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시작반 선생님은 내 시를 보고 그냥 좋다고 할뿐이었다. 그는 내 시를 몇 번이나 읽었다. 한참만에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우리가 연인으로 만나던 시절, 자주 내게 보여주던, 너무나 그립던 미소였다. 가슴 저 밑바닥이 저려왔다. "아주 좋은데. 다른 어떤 시와도 달라. 독특해. 서원 이는 반드시 훌륭한 시인이 될 거야." 그날 밤새도록 나는 시를 끄적거렸다. 내 시는 나의 분신이었다. 내 어둡고 싶은 곳으로 잠입하지 않고서는 시를 쓴다는 게 불가능했다. 시를 써가면서 나는 과거로 여행을 떠나야 했다. 악몽과도 같은 지난 세월의 온갖 어두운 기억들이 물밀 듯 솟구쳐왔다. 지난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는 건 피를 말리는 고통이었다. 시를 쓰는 동안, 그러잖아도 예민한 내 신경은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숙면을 취할 수도 없었다. 내 안의 어두운 기억들이 파편처럼 미리 속을 휘집고 다니다가 느닷없이 한 편의 시로 떠올랐다. 꿈속에서 도 나는 계속 시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방금 꿈속에서 생생하게 보았던 시를 미친 듯이 원고지에 되살렸다. 시를 쓰면서 떠난 과거로의 여행은 유년의 악몽까지 고스란히 되 살려냈다. 잠을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우면 주변에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소스라쳐 일어나 불을 켜보면 아무도 없었다. 심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신이 혼미했다. 악몽은 낮에도 계속됐다. 앉아서 시를 쓰고 있으면 검은 그림자들이나를 에워쌌다. 어린 시절의 악몽이 한층 강도를 높여 되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위경련까지 나를 괴롭혔다. 밤이면 더 끔찍했다. 서창으로 해가 지기 시작하면 손끝도 까딱할 수 없는 공포가 찾아왔다. 잠자는 게 무서웠다. 나는 결국 앓아 누웠다. 악몽과 싸우는 동안 여름이 오고 있었다. 나는 귀신이 왜 나타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불행한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귀신 영화가 잠재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가 마음이 약해지면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어른들의 말처럼 내게 신기가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악몽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내 시도 하나의 흐름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시작반 강사가 나를 불렀다. "박서 원씨 시를 잡지에 응모해봤으면 좋겠는데. 이번 문학정신 신인상에 응모해보지 않겠어요?" 뜻밖이었다. 아직 등단할 만한 수준이 아닐텐데…. "자신이 없는데요." 망설이는 내 대답에 시작반 강사가 직접 그 시를 <문학정신>에 보냈다. 그리고 열흘 후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다. 신인상에 당선된 것이었다. <문학정신>을 발행하는 열음사 사장은 여성이었다. 그분은 아주 반갑게 나를 맞았다. "시가 아주 좋더군요. 아직 불안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나라엔 박서 원씨 같은 시인이 없었어요." 사장이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외국문학>이라는 잡지였다. "거기 미국의 고백파 시인들 특집이 실렸는데, 고백파 시 읽어본 적 있어요?" 고백파 시인이라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정신분석 시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한 번 읽어봐요. 서원 씨랑 비슷한 부분이 많을 거예요." 열음사 김수경 사장이 소개해준 고백파 시인의 시는 내 시에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그들의 시를 읽지 않았더라면 내 시에 대한 확신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등단했다는 사실보다도 내 시의 지표가 될 시들을 만났다는 게 기뻤다. 89년 5월호 <문학정신>에 처음으로 내 시가 실렸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시였지만 내게는 소중한 출발이었다. 내 등단을 가장 기뻐 해준 사람은 물론 그 사람이었다. 젊은 날 시인이 되고 싶었다던 그는 마치 자기 일처럼 내 등단을 기뻐했다. 그가 곁에서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늘 너는 분명히 좋은 작가가 될 거라고 나를 격려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작은 출발이지만 내가 이룬 모든 것은 다 그의 덕택이었다. 우리는 아담한 카페에서 오붓한 축하연을 벌였다. 스물 넷에 그 사람을 만나 서른이 되기까지, 내 모든 삶은 그에게서 비롯되고 그에게로 귀결됐다. "서원아.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시작되나보다. 나 때문에 힘든 세월도 이제 끝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나만 바라보고 살거니? 너에게 아무 것도 못 해주는 나를 언제까지 바라보고 있을 거니?" 그가 나를 떠밀어내지만 않는다면 나는 평생이라도 그를 바라보며 살 수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빛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내고 싶어했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해바라기처럼, 결혼한 자신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내 사랑이 그에게는 안타깝고 견딜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세월이 흐를수록 내게 더 많은 것을 베풀면서도 그는 점점 더 미안해하고 있었다.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라는데… 그대 떠난 자리에 홀로 결혼한 남자를 바라보는 게 그토록 큰 죄일까? 그의 몸을 탐하지도 않고 아내 자리를 넘보지도 않고 그저 마음을 바라보기만 할뿐인데. 한 여자가 자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기만 하는 게 그토록 괴로웠을까? 내가 등단을 하고 나서 그러잖아도 뜸했던 그의 전화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이제 나에게도 자기 아닌 다른 무엇이 힘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게 문학이란 그로 인해 풍요로워진 마음의 한 표현일 뿐이었다. 밤을 새워 글을 써도 그에 대한 그리움이 메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큰 동생도 작은 동생도 결혼을 해서 나갔다. 이제 어머니만 책임지면 됐다. 열심히 시를 썼고, 내가 시를 통해 정화되는 듯한 느낌으로 행복했지만 시는 돈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배워둔 지점토가 그럭저럭 나와 어머니를 먹여 살렸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쯤 볼 수 있었다. 식사하고 커피를 마시는 정도의 짧은 만남이었다. 그래도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만난 때처럼 행복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소유욕이나 집착은 세월에 씻겨 말갛게 헹구어져 있었다. 이제 그는 나를 훤히 밝혀주는 태양은 아니더라도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겨울밤, 지치고 정처 없는 내 발길을 인도하는 먼 오두막집의 작은 불빛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막막한 세상 한가운데서 나는 갈 곳 없는 미아와도 같았다. 그 작은 불빛을 내 마음속에서 걷어내지 못한 나. 내가 어리석었던 것일까. 1992년 겨울. 그를 만나 여느 때처럼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 그는 평소보다 더 말이 없었다. 마음을 녹여보려고 애써 농담을 해도 웃지 않았다. 창밖으로 헐벗은 나뭇가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원아. 할 이야기가 있다." 커피 잔이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으나 그도 나도 커피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젠 결혼해라. 더 늦기 전에." "선생님 때문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저 내 조건이 누군가와 결혼하는 데 적당하지 않을 뿐이에요." 밑도 끝도 없이 가슴이 막막해졌다. 슬픔을 넘어선 막막함. 더 이상 그를 잡을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각을 바꿔라. 너는 세상 누구보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자야. 그런 너를 평생 사랑할 사람이 분명 있을 거야. 세월이 자나면 나를 잊게 될 거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내곁을 떠나리라는 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도 설마 설마 했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이별의 그림자를 애써 부인하고 있었다. "서원아. 나, 내일 미국 가."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나는 네 귀를 의심했다. "미국 간다." 쇠창살이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다. 서른 세 살의 나는 더 이상 발작 같은 건 일으키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서 나는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읽었다. 그를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편안히, 자유롭게 보내주는 것이었다. 이별을 준비하는 기간이 너무나 길어서 내 마음도 충분한 대비를 한 탓인지, 아니면 너무나 큰 절망 때문인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서원아. 작은아버지로 평생 네 곁에 있고 싶다는 것도 내 욕심이었던 것 같다. 너를 아주 놓아주었어야 했는데… 내가 돌아왔을 땐 네 곁에 듬직한 남편이 서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때는 정말 작은아버지로 너를 사랑할 수 있을 게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내 마지막 사랑이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건강 조심하시고요." "그래. 너도 건강해야지. 이젠 너에게 시가 있으니 한결 버티기 쉬울 거야." 그의 흰색 소나타가 나를 남기고 멀어져갔다. 그의 하얀 차만 보면 덩달아 내 마음까지 하얗게 밝아왔는데… 우리가 함께 했던 지난 9년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차츰 멀어져 가는 듯했다. 그는 다음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어디로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나는 지독한 거식증에 걸렸다.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오렌지 주스와 커피로 배를 채웠다. 일도 할 수 없었다. 시도 써지지 않았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뻥 뚫린 가슴에 뼈를 에는 시린 바람만 윙윙거리며 드나들었다. 완벽한 실의. 그에 대한 미움, 원망 같은 것도 없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일분일초가 영원처럼 길고 암담할 뿐이었다. 나는 매일 술을 마시고 토했다. 칵테일 한 잔도 버티지 못하는 몸으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소주를 마셨다. 깨어나면 취하기 전의 세상이 그대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다시 술병을 찾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도 없었다. 마시고 토하고 발작을 하다 쓰러지고 깨어나며 다시 마시고….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내 방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어디서도 빛 한 줄기 스며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불을 켰다. 빈방에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머리 속이 말갛게 텅 비어 있었다. 상쾌한 느낌이었다. 단 하나의 잡생각도 스며들지 않았다. 며칠을 굶었는지 몸도 깃털처럼 가벼웠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한 번도 쓰지 않은 면도칼의 칼날에 전등 빛이 수천 수만 조각으로 퉁겨져 나왔다. 면도칼에서 퉁겨져 나온 빛이 내 영혼을 온통 사로잡았다. 딱히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아니었다. 불에 이끌린 나방처럼 나는 면도칼을 집어들어 왼쪽 손목 깊숙이 찔러 넣었다. 살이 베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통증도 느낄 수 없었다. 면도칼로 손목을 길게 그었다. 뜨끈뜨끈한 액체가 방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방바닥에 피를 떨어뜨리며 나는 욕실로 갔다. 욕조에 물을 받았다.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욕조 물이 핏빛으로 변해가면서 내 영혼이 피처럼 몸밖으로 흘러나오는 듯했다. 날아오를 듯 몸이 가벼웠다. 안녕, 당신이 아니라면 나는 살아갈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의 손끝 하나에도 요동치던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다 거둬갑니다. 그래도 당신이 있어 아름다웠던 기억들도 모두…. 당신의 숨결 냄새가 나네요. 내 영혼보다 사랑했던 당신. 이제 그만 당신을 놓아드릴게요. 그럼 안녕….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물결은 살랑거렸고 몸을 스치는 바람은 상쾌하고 가벼웠다. 시간이 정지되는 듯한 황홀한 순간을 느꼈다. 내 몸이 하얀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욕조에 뜨거운 피가 흘러 넘쳐 거실 계단까지 불태우고 있다 칼은 네 몸을 안타까이 사모해 송이버섯 같은 애무의 흠집을 가하고 가하고 애무가 짙어 가면 갈수록 네 영혼은 은박지가 구겨져 빛나는 밤하늘 사이사이 잎새들 다람쥐별의 먹이가 될 것이다 혈관이 네 몸을 비워 온 집안을 뜨거운 피의 불로 물들일 때 프로펠러가 될 부엉이 시계 용광로가 될 아궁이와 부지깽이 갓 태어나 아기 같은 생일카드 저녁식사 후 트럼프 놀이, 즐거움으로 다시 즐거운 게임을 시작하고 붉은 바다 속에서 상아빛 시체보다 더 빛날 카펫 닻은 더 이상 지상으로 올라오는 고역을 치르지 않으리라 제 4 장 비탈 위에 집짓기 119구급대원의 청혼 하얀 천장이 보였다. 여기가 어딜까? 목욕탕 욕조에서 정신을 잃었던 기억이 났다. 왼쪽 손목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소독약 냄새가 독하게 빈속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흰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인생을 부여받았는데, 그 인생을 포기하는 것 또한 내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자살기도는 완벽했다. 어머니만 그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게 무엇 하나 베풀어주지 않은 이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겨준 어머니, 때로 나를 절벽으로 떠밀기도 했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낸 것이다. 그 무렵 어머니는 아이를 봐주러 큰 동생 집으로 옮겨가 있었다. 동생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이나 되어야 아이를 동생 내외에게 맡기고 나를 들여다보던 어머니였다. 아무 일도 없었고, 전화 한 통 없었던 평일 밤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찾아온 것이다. 느닷없이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자식에 대한 어미의 보호 본능이 작용한 것일까? 열흘만에 실밥을 풀고 퇴원했다. 퇴원 다음날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퇴원하셨군요. 괜찮습니까?"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였다. "…누구시죠?" "저 열흘 전에 뵈었던 119구급대원입니다. 물론 기억이 없으시겠지만요." "네. 감사합니다." 남자는 머뭇거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생명의 은인인데 왜 전화한 거냐고 물어 보기도 좀 민망했다. 퇴원하자마자 내가 찾아가서 고맙다고 먼저 인사를 하는 게 도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저희 집 근처에 오실 일 있으면 한번 들르세요. 차 한 잔 대접하지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은인이신데요." "저… 결혼 안 하셨죠?" "네. 그런데 그건 왜 묻죠?" "아닙니다. 그냥…." 그는 당황해서 어물거리다가 얼른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오후 다시 그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 여기 집 앞인데요. 댁으로 가기는 그렇고 잠깐 나와주시겠습니까? 여긴 집 앞 레스토랑입니다." 집에 놀러오라는 건 인사치레였을 뿐인데 그걸 정말로 믿고 찾아 온 것이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지만 어차피 한 번은 만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정식으로 해야 할 것 같아서 그곳으로 나갔다. 나는 예의를 갖추느라 약간 화장을 하고 외출복을 차려입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나를 보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보는 순간 그의 안색이 싹 변했다.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긴장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119구급대원은 입을 열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굳이 집 앞까지 찾아와서 말도 안 하는 건 뭔지 나는 그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했다. 한 참 뒤에 그는 옆에 있던 커다란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그야말로 한 보따리였다. 고마움의 표시로 내 시집을 들고 나갔는데, 그거 하나 달랑 건네주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선물은 제가 드려야 하는데…." 나는 가져온 시집을 건네준 뒤 선물을 뜯어보았다. 핑크색 수가 놓인 지갑과 향수, 화장품 케이스 등이었다. 나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사진이 찍힌 시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왜 말씀 안 하세요?" "뭐가 괴로우니까 자살하려 했겠지 싶어 글을 써보시라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프로시네요. 몰랐어요. 저한테는 너무 과분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데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그러신 것 같은데."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비킨 채 한참 만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청혼하러 왔습니다." 선물이 너무 과해서 나한테 마음이 있나보다 싶기는 했지만 너무 뜻밖의 소리였다. 만나자마자 청혼이라니. 그제야 처음 나를 보고 왜 그렇게 안색이 바뀌었는지 이해할 만했다. 피투성이로 병원에 실려가던 나와 겨울 모자에 정장을 한 내가 너무 달라서 선뜻 다가서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아가씨를 처음 봤을 때 창백한 모습이 꼭 잠자는 백설공주 같았어요." 119구급차가 달려와서 피투성이 여자를 담요에 둘둘 말아 싣고 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다. 잠자는 백설공주라니. 아무리 제 눈에 안경이라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남자가 너무 주눅이 들어 어쩔 줄 몰라 해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냥 웃고 말았다. "친구는 할 수 있어요." 남자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다른 어떤 사람도 들어앉을 공간이 없었다. 설령 그런 자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처음 본 남자의 청혼이 진지하게 생각됐을 리 없다. 돌아오는 길에는 자꾸 헛웃음만 피식피식 새어나왔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열흘 전의 자살 기도에 이르기까지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지만 나를 병원으로 데려간 119구급대원의 청혼을 받다니 내 인생이 싸구려 영화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다출혈에 영양실조까지 겹친 나를 두고 아들집으로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래? 왜 찾아왔대?" 어머니도 구급대원이 왜 집 앞까지 찾아왔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결혼하재. 기가 막혀서." "별놈이 다 있다. 그건 또 뭐냐?" 어머니가 내 손에 든 꾸러미를 가리켰다. "선물이래." "너한테 홀딱 빠진 모양이구나." 어머니의 말이 옳았다. 나는 그가 계속 찾아오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전화를 하고 이틀에 한 번 쉬는 날이면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손에는 언제나 옷이며 화장품, 액세서리 같은 선물이 들려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선물을 받는 것도 짜증스러웠고, 아무리 나를 구해준 사람이라지만 은인으로 예의껏 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일주일만에 나는 그에게 신경질을 내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요. 피투성이 여자를 보고 잠자는 공주라고 하질 않나, 보자마자 결혼을 하자고 하질 않나, 지금 댁의 행동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신경질을 부려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럴수록 내 신경질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내가 짜증을 부리면 그는 그저 미안해요, 미안해요, 소리를 연발하며 정말로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려서 그를 돌려보낸 뒷면 나는 밤을 새워 편지를 썼다. 받을 주소도 알지 못하는, 결코 부칠 수 없는 편지였다. 방금 전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돌아간 구급대원은 안중에도 없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 사람은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정말로 떠나보내기로 확고하게 마음먹었다는 것을 나는 아프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당신이 선택한 방법인가요? 당신을 보지 못하는 내가 이토록 괴로워하는데. 나를 보지 않고 당신은 행복한가요? 밤이면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다가 눈물도 편지를 지우면서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발작에서 깨어나면 간혹 전화벨이 울렸다. 혹 그 사람인가 싶어 달려가면 어김없이 구급대원의 전화였다. 어쩔 수 없는 그리움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가 원망스러웠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나를 밀어낸 그가 정말 미웠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럴 수 없었을 거라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라고 깊은 밤 소리치며 울기도 했다. 나날이 원망과 미움을 쌓아가면서도 한편으로 못 견디게 보고싶었다. 미국이 너무 멀어 내 그리움이 가 닿지 못하는 것일까? 눈이 녹고 나무마다 연둣빛 물이 오르고 샛노란 개나리가 담을 수놓아도 그에게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다. 개나리가 시들고 하얀 목련꽃이 뚝뚝 떨어지듯 서른 넷의 봄 또한 그렇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전혀 다른 빛깔의 사랑 사랑이 끝나고 나면 한동안은 추억으로 살아가지만, 한편으로 그 추억이 잔인한 칼날이 되어 마음 구석구석을 베어낸다. 눈을 뜨나 감으나 근 10년간 지속된 그와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백주대낮 난생 처음으로 자유롭게 팔짱을 끼었던 낙화암 가는 길이며, 아홉시 반이면 어김없이 집에 가야 한다고 옷을 입던 쓸쓸한 뒷모습까지 무엇 하나 그립지 않은 게 없었다. 이제 다시는 내 것일 수 없는 그의 흰머리, 눈가의 깊은 주름, 그 환하던 미소…. 하나의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을 한 점씩 도려내는 듯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찾아왔다. 내 마음의 지옥도 알지 못한 채 119구급대원의 나를 향한 사랑은 계속되었다. 아무리 화를 내고 못되게 굴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그가 측은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나를 이토록 사랑해주는 것일까. 그의 사랑이 내게 과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그런 생각으로 기분이 좀 풀어져서 그에게 물었다. "나 병자예요. 아무 데나 쓰러져서 발작하는데, 평생 나을 수 없는 병이에요. 오랫동안 약을 먹어서 아이도 못 낳아요. 그런데도 나와 결혼하고 싶어요?" 그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늘 시무룩하게 풀죽어 있던 그의 얼굴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희미하게 번져갔다. "서원 씨가 나를 받아들여만 준다면 아무 것도 상관 안해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냥 내 곁에만 있어 주세요." 나도 그렇게 말했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그냥 곁에 있게만 해 달라고. 당신을 바라볼 수만 있게 해달라고. 평생 해바라기밖에 할 수 없는 내가, 그리고 그가 마음 아팠다. 그런 그가 어느 사이 내 마음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사람이란 얼마나 이기적인 것일까? 어느새 그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때 나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 사랑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돌아보면 그가 늘 내 곁에 서 있었다. 은연중에, 네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하는 오기도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를 시험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언젠가 함께 카페에 갔을 때였다. 들어가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갔다. 그 사이 그는 냉커피를 시켜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확 짜증이 치밀었다. "나, 이 카페 마음에 안 들어서 화장실만 갔다가 나가려고 했단 말이에요. 혼자 먼저 시켜 먹는 법이 어딨어요? 사람이 왜 그렇게 예의가 없어요?" 발칵 짜증을 내며 핸드백을 들고 찬바람이 횡 돌게 카페를 나와버렸다. 냉커피를 채 마시지도 못한 채 그가 나를 따라나왔다. 아마도 몹시 목이 말라서였을 텐데, 내가 말도 안돼는 소리를 하면서 신경질을 부리면 그는 대꾸 한마디 못하고 죄인처럼 쩔쩔매기만 했다. 그렇게 못되게 굴어도 그는 내게 한결같았다. 그렇게 그는 못된 나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다시 악몽과 발작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식증 때문에 음식도 거의 먹지 못했다. 몸무게가 간신히 37킬로그램을 넘을 정도였다. 꽃샘 추위가 유난히 극성을 부리던 3월 초, 심한 감기에 걸렸다. 잘 먹지도 못하는데다가 감기까지 겹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약을 지으러 나가려 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머니나 구금대원이 아니면 찾아오는 이 없는 내 방. 불도 켜지 않은 방이 칠흑처럼 어두웠다. 감기 기운보다도 외로움이 뼈에 사무쳤다. 열에 들뜬 입에선 헤어진 이에 대한 그리움 같은 단내가 풀풀 풍겨왔다. 혼절하다시피 끙끙 앓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먼 환청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전 데요. 서원 씨." 119구급대원이었다. 네, 라고 입을 열었는데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났다. "왜 그래요. 왜 그래요, 서원 씨?" 아파요, 라고 말을 했지만 역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갈게요." 그는 내가 다시 자살기도라도 한 줄 알았는지 황급히 수화기를 놓았다. 그가 달려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까무라쳤다.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반백의 신사가 앉아 있었다. 하얀 머리칼이 창으로 새어 들어온 햇빛이 반짝거렸다. 그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이제야 온 거예요? 나 없는 어느 세상을 떠돌다가 이제야 내게로 온 거예요? "서원 씨, 서원 씨. 정신 들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구급대원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전화가 기억났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말해서 문 따고 들어왔어요. 의사 다녀갔는데 감기몸살이래요. 진작 연락을 하지 왜 그 지경까지 참고 있어요? 바보같이." 그의 눈이 젖어 있었다. "나를 좋아하지 말아요. 나, 좋은 여자 아니에요."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어 돌아누우며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도 그의 눈동자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나를 향한 그의 사랑에 매일 감동하면서 또 한편으론 네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 그를 시험하면서 봄이 깊어갔다. 그는 나를 만나느라 빈털터리였다. 이틀에 한 번 꼴의 데이트 비용에다, 만날 때마다 하는 선물에다, 119구급대원의 박봉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네가 얼마나 견디나 보자 하는 오기로 그를 대하던 나는 그의 주머니 사정 같은 건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주머니 탓인지 그는 늘 허름한 카페를 골랐다. 그에 대한 배려도 눈치도 없었던 나는 그의 안목에 짜증만 부렸다. "촌스러워. 다른 데 가요." 그러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내가 고르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카페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분과 9년을 넘게 만나면서 어느새 내 취향도 꽤 고급이 돼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고급 레스토랑을 찾았다. 그는 메뉴 판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주문을 하는 대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너무 비싸지 않아요?" "비싸긴 뭐가요. 레스토랑이 다 그렇죠." 나는 매몰차게 그의 말을 잘라버리고 주문을 하라며 그를 다그쳤다. 그는 한참 더 메뉴 판을 들여다보고는 가장 싼 것을 시켰다. 이번에는 그도 볼멘 표정이었다. 평소에는 내가 그 정도로 나가면 아무 말이 없던 사람인데 음식을 먹다 말고 툴툴거렸다. "비싸기만 하고 맛도 별로 없네." 갑자기 또 짜증이 치밀어서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툴툴거릴 거면 뭐하러 고급 레스토랑을 따라왔어요! 처음부터 싼 데 가자고 할 것이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화가 나서 그 집을 나와버렸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그는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봄이었다. 미풍이 내 몸을 휘감고 스쳐갔다. 봄바람 탓이었을까? 갑자기 그에게 미안해졌다. 119구급대원에게, 그것도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야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은 나이였지만, 구급대원은 아직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죄 하나로 아무런 이유 없이 모욕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었다. "월급이 얼마나 돼요?" 느닷없는 내 질문에 그가 아연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월급이 얼마나 되냐고요?" "그건 왜요?" "월급이 얼만지 알아야 돈을 얼마만큼 써도 되는지 알거 아니에요? 나도 그런 고급 집만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순대국도 잘 먹는다구요." 내 입에서 처음 나온 상냥한 소리였을 것이다. 늘 짜증이나 부리던 내가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진 게 너무 놀라운 모양이었다. 얼굴까지 붉히면서 그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월급 액수를 말했다. 그 동안 그가 내게 쓴 돈을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단 한푼도 쓰지 못했을 것이었다. 게다가 격일로 근무하는 사람이 쉬어야 할 날 나를 만나느라 쉬지도 못했으니 몸도 피곤했을 것이다. 착하고 단순한 그는 내 부드러운 말 한마디에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많이 피곤했는지 나를 만난 몇 달만에 살리 내려 볼이 움푹 팬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일지라도 사랑이란 축복인데, 그 사랑을 볼모로 이 사람을 너무 괴롭혔구나. 그날부터 나는 결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5월의 신부 몸이 아플 때 계절이 변해 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묘한 느낌이 든다. 세상이 나만 두고 저 혼자 달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누구나 계절이 바뀔 무렵엔 세월의 흐름에 무상함을 느끼기도 하고 왠지 마음이 허전해지기도 하지만, 병자의 그것은 강도가 훨씬 더하다. 4월, 우이동 주택가에는 온갖 꽃냄새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조금 열어둔 창 틈으로 훈훈한 봄바람이 스며들고 개나리며 목련 향기가 병든 내 몸 가득 차 오르는 듯했다. 방 깊숙이 내리꽂힌 봄햇살에 노곤해 있는데 갑자기 혈압이 뚝 떨어졌다. 발작이 시작되려는 징조였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구급대원이었다. 말을 하려는데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발작이 시작되면 입도 마비되면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의 엉성한 발음 수준이 되는 것이다. "왜 그래요? 서원 씨." "모… 몸이 아… 안…조와…" 말을 하다 말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 혼자 발작과 씨름할 땐 누군가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남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수치스럽기도 했다. 잠시 후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이미 발작이 진행돼서 목이 뒤로 꺾이고 호흡이 곤란한 상태였다. 그가 나를 들쳐업었다. 달리기 때문인지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인지 그의 등이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내 병을 잘 알지 못하는 그는 나를 근처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응급실 침상 옆에서 그의 숨죽인 울음소리를 들었다. 마비된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온몸이 마비되어도 눈물은 살아있다는 게 신기했다. 처음 그분 앞에서 발작하던 날이 떠올랐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슬픔만 주는 존재구나. 그분에게도 기쁨을 주고 싶었는데 나를 보면 늘 안타까움에 눈이 젖곤 했지…. 세시간만에 마비에서 풀려났다. 돌아오는 길 그는 말이 없었다. 집 앞에서 돌아서는 그의 등뒤에 대고 물었다. "나, 끔찍하지 않아요? 그래도 내가 좋아요?" 천천히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소처럼 투명하고 맑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상관없어요. 서원 씨가 어떤 사람 이래도 나는 상관없어요." 나는 오래도록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건강하고 착한 여자를 만날 수도 있을 텐데 미련하게 골치 아픈 여자를 죽자고 사랑하는 사람. 사랑이란 그렇게 앞 뒤 구별이 없어서 아름다운 것일까.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기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이틀 뒤 근무를 끝낸 그가 나를 찾아왔다. 발작을 보고 갔던 터라 안심이 안 된 모양이었다. 늦은 밤이었다. 그날은 왠지 무서움증이 심했다. 주변에 무엇인가가 나를 보고 있는 듯한, 악몽의 전조였다. "오늘, 여기 있어주면 안 돼요? 무서워서 그래요." 잠깐 망설이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다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그가 옆으로 쓰러져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피곤했는지 연신 끙끙 앓고 있었다. 괜히 붙잡았구나, 나 혼자 견딜 걸 싶었다.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고 내 방에 와 누웠다. 앓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에게 미안하면서도 혼자 있을 때처럼 무섭고 외롭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나보다는 둘이 낫고, 언제라도 내 편일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결혼이란 걸 하는 모양이었다. 5월이 되었다. 그는 변함없이 나를 찾아왔다. 나의 냉대와 짜증은 어느새 많이 줄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첫날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절당할 걸 뻔히 안다는 듯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랑 결혼해주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잠시 어리둥절했던 그의 눈빛에 서서히 기쁨의 빛깔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빛이 내 마음까지 환하게 했다. 그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기쁨으로 충만했던 눈이 촉촉이 젖고 있었다. "고마워요, 서원 씨.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행복하게 해줄게요. 평생 당신만 사랑할게요." 그는 기쁨에 들떠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 사라질 줄 모르는 그분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결혼을 결심한 데는 그분에 대한 작은 복수심이 깔려 있었던 것도 같다. 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당신이 그토록 원한다면 당신 뜻대로 해주리라.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그분이 떠나간 내 삶을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몰두한 지난 10년간 나는 일상의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제 다시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그분이 아니라면 내게는 다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가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면 그의 아내가 되어주리라. 그의 아내로 그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살리라. 5월 6일. 청혼을 승낙한 지 열흘만에 성당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축하객도 별로 없는 초라한 결혼식이었지만 하늘만은 눈부시게 푸르고 햇살은 터질 듯 싱그러웠다. 미사포를 쓰고 결혼식장으로 들어가면서도 내 머리 속에는 온통 그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당신. 이제 나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됩니다.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내 곁에 선 남자가 보여요, 당신? 그가 내 남편이에요. 내가 고른 남자예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지만 나를 천사로 아는 사람이에요. 이제 행복해요? 이게 당신이 진정으로 원한 일인가요? 지난 추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갔다.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그분 앞에서 늘 울기만 하던 눈물 많은 내가 그분 아닌 다른 남자와의 내 결혼식을 마치 남의 결혼식인 양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또 다른 이별을 맞을 때 생각대로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근무가 끝나는 대로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달려왔다. 24시간 격일근무라 퇴근할 무렵엔 거의 파김치가 된 상태인데도 남편은 내 손끝에 물 한 방울 못 묻히게 했다. "서원 씨는 그냥 가만 앉아 있어요. 앉아서 보기만 해요." 함께 사는 동안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미안해서 거들기만 하겠다고 해도 그는 무작정 말렸다.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제육볶음을 만들거나 김치라면을 끓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졌다. 거식증으로 고생하는 나에게 밥 한 술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그는 별짓을 다 했다. 뭐가 먹고 싶다고 하면 당장 달려나갔고, 생선살을 발라 수저에 얹어주기도 했다. "그만 먹을래요. 넘어올 것 같단 말이야." 피곤한 그가 기껏 만들어준 음식을 두세숟갈 께적거리다 짜증을 부려도 그는 인상 한번 쓰지 않았다. "그래도 한 숟갈만 더 먹어요. 딱 한 숟갈만, 자." 남편이 떠먹여주는 밥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정성 덕분에 결혼한 지 석달만에 몸무게가 4킬로그램쯤 늘었다. 그런 때조차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분의 모습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리움에 못 이겨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써놓고 나면 문득 남편의 착하디 착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남편의 품에 안겨서도 그분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내가 싫었다. 창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때면 적반하장으로 아무 죄 없는 남편에게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이유도 모르는 남편은 내가 시인이라 감성이 예민해서 그런 줄만 알고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남편을 보는 건 고문이었다. 그래서 더 짜증을 부리게 되는 것이었다. 남편은 특별한 취미가 없었다. 쉬는 날이면 그저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낮잠을 자는 게 일이었다. 사법고시를 봐서 검사가 되는 게 그의 꿈이었지만 직장에 다니면서 고시 준비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의 꿈을 이루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그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살림도 변변히 할 수 없는 내 건강으로 시를 쓰고 돈벌이까지 한다는 건 무리였다. 쉬는 날이면 둘이서 비디오를 빌려 보곤 했다. 착한 남편은 비디오 고르는 것도 다 내 뜻에 따랐다. 함께 비디오를 빌려 돌아오는 길은 그런 대로 즐거웠다. <바톤 핑크>나 <현 위의 인생> 같은 영화를 나란히 누워 보고 있노라면 10분도 안돼 그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졸지 않고 보는 유일한 영화는 액션 영화였다. 코를 골며 곤히 자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못 되게도 그분과 함께 나누었던 즐거운 대화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영화를 나 때문에 기꺼이 함께 보려고 하는 그의 아름답고 착한 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온전히 채우고 있는 그분에 대한 기억은 남편의 착한 마음으로도 달래지지 않았다. 그분과, 그리고 우리가 함께 했던 지난 10년은 이미 내 육신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칸방에 둘이 부대끼며 사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가 쉬는 날이면 시가 써지지 않았다. 동생에게 맡겨놓았던 약간의 돈을 찾아 두 칸짜리 방으로 이사를 했다. 숨통이 트였다. 그 무렵부터 시부모의 전화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아가. 아직 소식 없냐?" 남편은 맏아들이었다. 맞 손자를 기다리는 시부모의 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해드릴 수가 없는 일이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어서 나는 우물쭈물 전화를 끊곤 했다. 그런 내 태도가 못 마땅하셨던 것일까. 일주일에 한 번쯤이던 전화가 이삼일에 한번으로 마침내는 아침저녁으로 걸려왔다. 전화벨만 울리면 자지러지게 놀라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죄 없는 남편만 볶아댔다. "제발 좀 어떻게 해봐요. 애를 낳을 수 없는 여자라고 말씀을 드려요. 이러다 나 미칠 것 같애." 그러나 마음 여린 남편은 차마 그 소리만은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부모를 설득하는 듯했다. 며느리 나이가 서른 넷인데 더 기다리라니 씨도 안 먹힐 소리였다. 시부모님이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지은 약을 들고. 미칠 것 같았다. 아이를 진정으로 원하는 건 바로 나였다. 나도 자궁 속에서 한 생명을 잉태시키는 어엿한 여자이고 싶었다. 생명을 잉태시킬 수 없는 불모의 땅, 황폐한 내 여성을 누구보다 내가 견딜 수 없었다, 서른을 넘어서면서부터 나는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무렵 조카가 태어났다. 큰 동생의 아이였다. 작게 꼼지락 거니는 발이며 오물거리는 입. 조카아이 치민 이를 본 순간 갑자기 배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아이를 내가 낳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매일 조카를 보러 동생 집으로 갔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여자들은 똥기저귀가 더러워서 만질 수가 없다고 하던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뼈만 남은 팔로 아이 기저귀를 빨고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키고, 하루종일 아이를 안고 있다시피 했다. 치민 이가 오물거리며 우유 병을 빠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젖을 물리고 싶은 욕망에 진저리쳤다. 그토록 간절하게 나도 아이를 낳고 싶었다. 내 뱃속에서 아이의 발길질을 느끼고 싶었고, 아이를 낳은 산통을 느끼고 싶었다. 그분에 대한 그리움보다도 더 절실한 욕망이었다. 피임기구를 쓰는 순간마다 그냥 온전히 남편을 받아들이고 싶어 몸부림쳤다. 내 안에 생명을 키울 수 있도록.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약물중독 때문에 기형아 출산 확률이 거의 100프로. 아이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일그러진 생명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모차에 탄 아이만 지나가도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는 나에게 시부모의 성화는 덴 자리에 다시 뜨거운 기름을 퍼붓는 격이었다. 내가 찾은 유일한 도피처는 시였다. 아니, 시는 내게 정신의 아이였다. 육신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는 정신의 창조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막 시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전화가 걸려오고, 마음을 간신히 추슬러 다시 책상 앞에 앉을 만하면 이번에는 초인종이 울렸다. "제발 당신 아버지 좀 못 오시게 해요. 도저히 시를 못 쓰겠어요!" 지쳐서 퇴근해 들어오는 남편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책이었다. 결혼 초에 올랐던 살이 다시 내렸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와 부모 사이에서 지쳐갔다. 그도 나도 못할 노릇이었다. "우리 그만 헤어져요. 당신도 나도 둘 다 불행하잖아요. 당신은 맏아들인데 대를 이어야죠. 애 낳을 수 있는 건강하고 착한 여자 만나서 새로 시작해요." 내가 그렇게 졸라대면 남편은 말없이 방바닥만 바라보다가 굵은 눈물을 떨구곤 했다. "알아요. 서원 씨 붙잡아 두는 게 내 욕심이라는 거…." 결혼한 지 일년만에 이혼이라는 말이 거의 매일 튀어나왔다. 죽어도 이혼은 하지 않을 것 같던 남편도 서서히 지쳐갔다. 이혼 말이 나온 지 9개월, 우리는 합의 이혼 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혼하기 전날 그는 내게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천 만원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내가 알건대 그는 땡전 한푼 없는 알거지였다. 나를 만나기 전에는 장남이라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월급이 거의 다 들어갔고 나와 결혼 후에도 내게 넉넉지 않은 용돈을 타다 쓰지 않았던가. "이게 뭐예요?" "당분간 이걸로 살아요. 서원 씨가 건강 걱정 안하고 좋은 시 썼으면 좋겠어요. 훌륭한 시인이 되도록 늘 빌게요." 내 시를 읽으면 무슨 말인지 몰라 당혹해서 얼굴을 붉히던 남자였다. 그 뒤론 나도 내 시를 읽어보란 소리 한번 하지 않았고 자기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헤어지는 마당에 돈걱정하지 말고 시 쓰라며 돈을 내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착한 남자를…. "이 돈 어디서 났어요?" 걱정 말고 가져가라던 남편이 내 집요한 추궁에 한참 만에야 융자받은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당신 월급으로 이걸 언제 다 갚으려고요?" "괜찮아요. 내 걱정은 말아요.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무 것도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받아라, 못 받겠다 한참 승강이가 벌어졌다. 내일이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을 사람들이. 내가 고집을 부리자 그는 뭘 생각하는 눈 치더니 돈을 챙겨 넣었다. 나도 당장 살아갈 일이 막막했지만 그렇다고 그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천만 원이 우스운 사람도 있겠지만 그나 나나 그 돈을 모으려면 몇 년쯤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그 돈은 며칠 뒤 내 통장에 입금되어 있었다. 부부로 들어갔다가 남이 되어 나온 법원 앞에서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1년 9개월간의 길지 않은 결혼생활, 늘 그분을 꿈꾸면서 살았지만 그래도 그는 내 인생에서 그분 외의 유일한 남자였다. 막상 이혼을 하고 보니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인 것 같았다. "당신, 참 착한 사람이에요. 미안해요. 좋은 아내가 못 되어서 앞으로 건강하고 좋은 여자 만나서 아이 낳고 잘 살아요. 당신은 분명히 잘 살 거예요. 좋은 사람이니까." "나, 정말 아이 같은 거 필요 없는데… 서원 씨만 있으면…." 그는 언제 나처럼 고개를 숙인 채 탁자 위에 떨어진 물방울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맞지 않는 옷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하기도 했다. "서원 씨. 미안해요. 잘 해 주고 싶었는데 고생만 시켰어요. 당신은 판사나 검사 같은 사람한테 어울리는 여잔데… 내가 너무 내 욕심만 부렸나봐요. 미안해요." 내가 두 잔째 커피를 시켜 마시고 있을 때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이혼이라는 못할 결정이 그의 마음을 좀 편안하게 했는지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축복하면서 헤어졌다. 나는 진정으로 그가 행복하길 바랐고 지금도 그렇다. 그가 부모님의 소원대로 새로운 가정을 꾸며서 건강하고 예쁜 아이를 낳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가끔은 그를 위해 기도한다. 그분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그와 결혼한 내 죄닦음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짜증만 부리고 신경질만 냈던 것도 두고두고 미안하다. 사랑은 아니었다할지라도 그를 그만큼 신뢰하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렇게 내 바닥을 드러내 보일 만큼 그를 신뢰했던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굳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은 혹 영원히 간직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분의 자리를 그가 대신하는 게 두려웠던 탓은 아니었을까. 그는 아직도 내가 자기와 사는 동안 내내 다른 사람을 꿈꾸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내가 자기로서는 언감생심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높고 귀한 여자라고만, 그래서 우리 결혼생활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고 만 믿고 있을 것이다. 일부러 그를 기만한 건 아니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멈출 줄 모르고 그 분만을 향해서 달려가는 내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도 함께 사는 동안 그의 투명하고 맑은 마음이 내게 많은 힘이 되었다는 걸 그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헌신적인 사랑이 죽음의 유혹으로부터, 절망의 밑바닥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는 것도…. 헤어진 부부인지, 결혼할 연인인지 이혼을 하고도 남편은 쉽게 내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자주 전화가 걸려왔다. 나예요…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던 남편. "이제 그만 마음을 정리해야죠." "그냥 서원 씨 아플까봐 전화했어요. 아픈 데 없어요? 밥 잘 먹어요?" "네. 잘 지내니까 내 걱정 그만해요." 내 목소리에서 감기 기운만 느껴져도 그는 약을 사들고 달려왔다. 이제 영영 남인 그는 자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어머니와 함께 사는 집안으로 들어오기가 민망했는지 문 밖에서 약을 건네주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돌아서곤 했다. 처량한 뒷모습을 끝까지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그가 골목을 벗어나기도 전에 나는 집으로 들어와버려야 했다. 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먹여 보내고 싶었지만 나를 빨리 잊도록 해 주는 게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단순하고 우직한 그는 나를 쉽게 지울 수 없는 것 같았다. 내 생일이거나 명절 같은 때면 선물을 사들고 나를 찾아왔다. 누가 봤으면 이혼한 부부가 아니라 곧 결혼할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한 번은 커다란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왔다. "이게 다 뭐예요?" "풀어봐요." 거들이며 속옷 일습이었다. "지나가는 데 참 예뻐 보였어요. 서원 씨 입으면 예쁠 것 같아서… 한번도 이런 선물 준 적 없잖아요." "말라서 거들 같은 건 입지도 못해요. 뭐 이런 걸 사요." "그래서 제일 작은 거 달라고 했는데… 안 맞으면 바꾸러 오겠다고 했으니까 가서 마음에 드는 걸로 바꿔도 돼요." 그는 내게 물건 산 가게를 상세히 일러주었다. 119 구급대원, 내 전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혼한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은행에 갔더니 웬 돈이 200만원이나 입금되어 있었다. 돈 들어올 일이 없을 때라 통장확인을 해보았다. 그가 부친 돈이었다. 이혼하고 처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에서야 확인했는데 무슨 돈이에요?" "그냥 쓰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 에요? 헤어지면서 천만 원이나 줬잖아요. 아직 빛도 다 못 갚았을 텐데 그 돈 당장 가져가요." 그의 통장을 부쳐주려 해도 통장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이혼한 아내의 통장번호를 1년씩이나 간직하고 있는데. "그러지 말아요. 서원 씨.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주고 싶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당신이 뭐 죄졌어요? 나한테 왜 그래요? 당신은 할만큼 다 했어요 더 이상 이러지 말아요. 내가 부담스럽고 힘들다고요. 우리 만나요. 만나서 이 돈 가져가요." 그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가 그럴수록 내 죄책감은 깊어갔다. 나도 누군가에게 짐이 되기보다 베푸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나는 늘 모두에게 짐만 되는 것일까. 찾아오는 횟수는 차츰 줄어들었지만 2년이 흐를 때까지 전남편은 꾸준히 연락을 해왔다. 2년쯤 흐른 어느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컴퓨터가 말썽을 부리더니 한참 시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먹통이 되어버렸다. 낑낑거리며 컴퓨터를 들고 수리센터에 갔더니 워낙 고물이라 차라리 사는 게 더 싸게 먹힐 거라고 했다. 근근히 먹고살던 때라 컴퓨터를 살 만한 목돈이 있는데 그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 기분에 민감한 그는 여보세요, 한 마디에 내 심정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컴퓨터가 고장 났어요. 고칠 수도 없다네." "그래요…." "그나저나 잘 지냈어요? 아직도 혼자예요? 좋아하는 여자 안 생겼어요?" "그렇죠. 뭐."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다. 좋은 여자 만나서 빨리 결혼해요." 그런 정도의 의례적인 인사말을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출판사에서 원고료가 들어올 게 있어서 은행에 갔다. 이번에도 그의 이름으로 200만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헤어진지 2년이 지났는데도 계속 내게 연연해하는 그가 놀랍기도 하고, 한편 짜증스럽기도 했다. 나는 그가 빨리 나를 잊고 새 출발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그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또 뭐예요? 왜 자꾸 그래요?" "컴퓨터 고장났다면서요? 컴퓨터 사라고요. 내가 직접 사다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받을 것 같아서…." 컴퓨터가 고장났다는 일상적인 내 짜증을 그는 흘려듣지 않은 것이다. 사랑이란 왜 늘 이렇게 어긋나기만 하는 것일까? 내 사소한 일도 그냥 흘려듣지 못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면 내 인생에도 작은 행복이 깃들일 수 있었을 텐데. 그의 따스한 마음에 눈시울을 적시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그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와 나는 아주 닮은꼴이다. 한 번 시작한 사랑은 이별로도 지워버리지 못하는, 단순하고 불행한 사람들인 것이다. 아직도 나는 전남편이 보내준 돈으로 산 컴퓨터를 쓰고 있다. 내 시집 두권이 그 컴퓨터로 완성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을 때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를 지극히 사랑해준 두 남자. 내 인생도 그다지 불행했던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 껍질 속에 갇힌 아이 인생이란 무수한 만남의 연속이다. 살아가는 동안 사람과도 만나고 책과도 만나고 숱한 사건과도 만난다. 그중 어떤 것들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어떤 것들은 잔 바람처럼 소리 없이 잊혀져가기도 한다. 만남을 통해 사람은 성장한다. 나, 스물 넷에 한 남자를 만나 9년을 사랑했다. 서른 넷에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1년여만에 헤어졌다. 서른 다섯의 나는 인생을 다 살아버린 것 같았다. 또 다른 만남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새로운 만남보다는 기왕의 연인들과 하나둘 이별해가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처럼 나는 거의 정지해 있는 상태였다. 시들어 가는 한 포기 식물 같았다. 내게 더 아름다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줄 나는 몰랐다. 그와의 만남보다도 더 강렬하고 질긴 만남이 정지한 내 인생으로 뛰어들어 나를 온통 휘저어 놓을 줄 나는 몰랐다. 내가 이혼한 얼마 후, 부부싸움이 잦았던 큰 동생도 이혼을 해 어머니와 내가 사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나와 동생에게 연속적으로 들이닥친 불행 때문에 집안 식구들 모두 침울해 있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큰조카 치민 이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작은 위안이 됐다. 이혼 문제로 집안이 시끄러운 동안 잠시 못 보고 지냈지만, 이전부터 치민 이는 제 부모보다 나를 더 잘 따랐었다. 집에 놀러 가면 고모, 고모, 내 품으로 뛰어들던 아이였다. 치민 이는 내가 서른 한 살 되던 해에 태어났다. 그 무렵 나는 아이를 갖고 싶어 몸살을 앓았다. 아이를 낳고 싶은 무슨 병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임신한 올케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부럽다 못해 질투를 느꼈다. 한 번은 올케의 부른 배에 손을 얹었는데 태아의 움직임이 내 손에 와 닿았다. 순간 내 뱃속에도 그렇게 숨쉬고 꼼지락거리는 생명을 품고 싶은 욕구가 간절하게 솟구쳤다. 나는 치민 이가 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처럼 열 달이 지나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세상에 나온 치민 이를 누구보다 먼저 안아본 것도 나였다.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희열은 정말이지 직접 아이를 낳은 산모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치민 이는 세상에 나올 때부터 내 자식 같았다. 봄비 내린 후의 새싹처럼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답게 치민 이 못 본지 몇 달만에 훌쩍 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동생이 우리 집 벨을 눌렀을 때 치민 이는 제 아버지 품에 안겨 있었다. "치민 아!" 반가워 불렀지만 치민 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얼른 아이를 받아 안은 순간 나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예전에 치민 이를 안을 때면 아이가 작은 두 팔로 내 목을 휘감으며 바짝 안겨 무거운 줄 몰랐는데. 이번에는 아이가 아무 반응이 없으니 그 무게가 고스란히 전달돼온 것이었다. 나는 아이를 마루에 내려놓았다. 내가 내려놓은 자세 그대로 아이는 가만히 서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아이와 마주보았다. "치민 아. 이제부터 고모랑 여기서 살 거야. 치민 이 좋지?" 아이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 애가 좀 이상하다. 왜 저러니?" 동생은 대답 대신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치민 이 곁에 가서 다시 말을 붙여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꿈쩍도 않고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건 다섯 살배기 아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완전히 실의에 빠진 사람의 눈빛이 그럴까. 아이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내버려두다니. 동생 부부에게 화가 치밀었다. 불행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잠겨 있는 치민 이가 애처롭고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부모의 불화로 아이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일까. 동생은 아이를 비디오 앞에 앉히고 만화영화를 틀어주었다. 그제야 아이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언젠가 한양대학병원 신경정신과에서 보았던 한 아이가 떠올랐다. 자폐증이라던 그 아이는 치민 이 같이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굳어버린 석상 같다고 할까, 아니면 제 껍질에 갇혀 바깥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거북이나 달팽이 같다고 해야 할까. 치민 이도 초기 자폐증이 아닐까 싶었다 열여덟살 때부터 줄곧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살아온 나는 왠지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영영 회복되지 못할 것만 같던 내 병이 그곳에서 치유 받아 다시 생활을 꾸려갈 수 있게 됐는데도 선뜻 치민 이를 그곳으로 데려가고 싶지 않은 모순된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이가 앞으로 정신과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다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정말 어리석은 일이 될지도 모르는 결정을 내리게 했다. 병원을 다니면서 온갖 환자를 다 보았고 그 증상과 치료법도 수없이 귀동냥했던 나는 우선 내가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보자고 감히 마음먹었다. 그러고도 반응이 없으면 그때 가서 병원을 찾자고. 먼저 나는 아이에게 자꾸 말을 시키면서 반응을 보는 일부러 시작했다. 매일 장난감을 사놓고 이리저리 보여주면서 말을 걸었다. 며칠이 가도 아이의 눈에는 아무런 빛도 떠오르지 않았다. 슬픔도 기쁨도 아무런 감정 이도 담기지 않음 눈빛으로 치민 이는 그저 가만 히 읽을 뿐이었다. 그래도 계속 말을 시켰다. 동화책도 소리내어 읽고 옛날 얘기도 해주었다. 치민 이를 따라 나도 다섯 살배기 아이의 세계에 들어가서 살았다. "치민 아. 이것 봐. 크리스마스 카드야. 크리스마스 카드가 뭔지 알아?" 나는 닭 울음소리를 내는 카드를 내보였다. 카드를 열었더니 꼬꼬댁 닭 우는소리가 들렸다. "꼬꼬댁 소리 나지?" 아이의 얼굴에 설핏 웃음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희미한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이의 얼굴에는 세상을 다 살아버린 사람 같은 무표정만 남아 있었다. 치민 이가 우리 집에 오던 날부터 나는 치민 이를 데리고 잤다. 치민 이도 나처럼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깊은 밤, 이제 아이가 자겠지 싶어 일어나 스탠드를 켜면 아이는 그때까지 뜬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느라 잠을 못 자는 것일까.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와락 치민 이를 품에 안았다. 하지만 아이는 나무토막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아이의 조그만 손을 끌어나 내 가슴에 댔다. 치민 이의 손이 약간 움츠러드는 듯했지만, 잠시 후 그 작은 손이 내 가슴을 조몰락거리기 시작했다. 내 젖을 만지면서 아이는 어느새 새근새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치민 이에게 젖은 그 동안 받지 못했던 엄마의 사랑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창밖엔 눈발이 흩날리고 내 품에선 치민 이의 가녀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풍선이 돼 두둥실 눈 내리는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었다. 치민 이가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내 품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내게서 엄마의 정을 느낀 것일까. 치민 이가 차츰 내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지만. 아이가 내 말에 반응을 보이자 일단 대소변부터 가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민 이는 그때까지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게다가 변비가 아주 심해 매번 피똥을 누었다. "엄마. 치민 이 기저귀 떼야겠어." 치민 이 기저귀를 갈고 있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오줌 싸면 어떡하려고." "내가 책임질게. 언제까지 기저귀를 차게 할?" 나는 하루에 몇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정확한 시간에 아이를 변기에 데려다 앉혔다. 일주일만에 혼자 소변을 볼 수 있게 됐다. 문제는 변비였다. 변비를 치료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매일 샐러드를 만들어 먹이고 하루에 세 개씩 사과를 갈아 먹였다. 주스를 먹이고 나면 아이를 눕혀서 배 마사지를 했다. 제대로 변을 보지 못하는 치민 이의 배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부모의 불화 때문에 상처 입은 치민 이의 마음처럼. 배를 주무르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아이를 변기에 앉혔다. 나도 좁은 화장실 변기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치민 아. 힘 줘봐. 그래야 배가 안 아파." 아이는 안간힘을 쓰며 끙끙 힘을 주었다. 아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자기 세계에 갇힌 치민 이는 아무리 아파도 소리내 울지 않았다. 그런 치민 이를 보며 내가 울었다. 변을 보려고 고통스럽게 힘주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여린 손이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렇게 30분이 지나도 치민 이는 변을 보지 못했다. 다리가 저려 왔다. 변기 위에 앉은 치민 이도 작은 엉덩이가 아픈지 자꾸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변이 나올 것 같니?" 대개는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사나흘에 한 번쯤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끄덕였다. 아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변을 보았다. 변기를 들여다보면 벌건 핏물이 고여 있었다.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지옥 같았던 변비는 3개월만에 잡혔다. 함께 변비를 고치느라 고생하는 동안 치민 이와 나는 훨씬 가까워졌다. 내가 밥을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치민 이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밤에도 내 젖을 만져야 잠이 들었다. 나도 치민 이를 안고 있으면 어느새 잠에 빠져들곤 했다. "넌 애도 안 낳아본 애가 이상하지도 않니?" 어머니가 눈치를 주었지만 나는 행복하기만 했다. 치민 이는 전생에 꼭 내 아들이었던 것만 같았다. 아이가 내 젖을 만지고 있으면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치민 이가 내 품에 안겨 있는 동안은 그에 대한 그리움도 원망도 다 잊을 수 있었다. 봄빛이 활짝 피어나던 어느 날 장난감 자동차를 샀다. 그 무렵 나는 여유 돈만 생기면 완구점으로 달려갔다. 아이가 무엇에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가능한 한 여러 가지를 접하게 하고 관심을 끌어야 했다. 아이 앞에 자동차를 놓고 말을 붙였다. "이거 봐라. 치민 아. 저기 불났다. 소방차 타고 불 끄러 가야지." 불자동차를 손으로 밀면서 달리는 시늉을 했다. 순간 아이의 눈에 한 줄기 빛이 스치는 것 같았다. "빵빵." 아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터져나온 소리였다. 나는 아이를 덥석 끌어안고 여린 아이의 볼에 마구 내 뺨을 비볐다. 내 눈에서 솟구친 뜨거운 눈물이 우리 뺨을 적셨다. 치민 이에게도 내게도 봄이 오고 있었다. 나를 키운 아들 치민 이 어느새 싱그러운 초여름이 다가왔다. 치민 이를 데리고 드림랜드에 갔다. 내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던 치민 이는 낯선 사람들을 보자 업어달라고 성화였다. 아이를 업고 사람들 틈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그렇게 라도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히게 하고 싶었다. 드림랜드에 장식용 말을 타고 사진 찍는 곳이 있었다. 아이에게 물었다. "치민 아, 말 타고 사진 찍을래? 우리 치민 이 사진 찍으면 아주 예쁠 텐데." 웬일인지 아이가 고개를 젓지 않았다. 아이를 말 위에 앉혔다. "치민 아, 웃어봐. 그래야 이쁘지. 자, 치즈." 치민 이가 정말 '치즈' 하듯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처음으로 웃은 것이었다, 일부러 만든 웃음이었지만 어쨌든 치민 이가 처음으로 지은 밝은 표정이었다. 다음부터 나는 치민 이와 밖에 나갈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생각대로 치민 이는 사진 찍는 걸 아주 좋아했다. 한 손을 제 허리춤에 대고 제법 폼을 잡기도 했다. 1년만에 앨범 네 개가 꽉 차도록 난 치민 이 사진을 찍어댔다. 치민 이는 나만 따랐다.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말을 안 하다가도 나와 둘이 되면 한두 마디씩 입을 열었다. 내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기겁을 해서 달려나왔다. 잠깐 슈퍼를 갈 때도 "고모, 고모" 울면서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치민 아. 고모 금방 슈퍼 갔다 올게. 착하지. 할머니랑 잠깐만 있어, 응?" 그래도 치민 이는 막무가내였다. 갓난아이처럼 잠시도 곁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동네 어딜 가든 데리고 다녀야 했다. 낯선 사람들을 너무 두려워해서 아예 아이를 업고 다녔다. 40킬로그램이 겨우 넘는 몸으로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게 힘에 부쳤지만, 내 등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막인양 두 팔로 꼭 매달려 있는 아이의 체온이 느껴지면 모든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게 마음 문을 열었다고는 하지만 아이는 내 감정에도 대단히 민감했다. 하루는 저녁을 해 놓고 불렀는데 서너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거실로 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비디오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치민 아!" 몸이 피곤했던 터라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평소와 다른 기색을 느꼈는지 치민 이가 얼른 나를 돌아보았다. 내 표정이 굳어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치민 아. 괜찮아. 고모 화 안 났어. 정말이야." 아이의 묵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렇게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나도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늘 병에 시달리는 데다 신경이 예민해서 오히려 찌푸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 내가 치민 이 앞에서만큼은 늘 웃는 얼굴인 것이 어머니는 신기 했나보다. "너 같은 신경질쟁이가 치민 이한테는 어쩜 그렇게 잘 하니?" 하긴 나도 그런 내가 신기했다. 내 속에 그런 평화로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제 속으로 아이 한 번 낳아보지 못한 여자에게도 모성이 존재한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를 만나면서 나는 그를 내 영혼처럼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치민 이를 키우면서 어느새 그에 대한 그리움이 옅어지고 있었다. 문득문득 그와 함께 보낸 때가 아릿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내게는 치민 이가 있었다. 치민 이가 없었다면 나는 다시 죽음의 길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비 내리는 날, 빗줄기 사이로 그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때마다 죽음의 유혹을 느끼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을 보노라면 내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움이 요동치던 내 마음속에 한 줄기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물줄기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어린 치민 이의 영혼과 내 영혼의 슬픔이 손을 맞잡고 서로의 슬픔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치민 이 마음의 병은 봄이 지나면서 빠르게 회복됐다. 그러나 잔병치레가 심해 자주 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치민 이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워낙 신경이 예민해서 깊은 잠을 못 자기도 했지만 그 무렵 나는 치민 이가 뒤척이기만 해도 놀라서 번쩍 눈을 뜨곤 했다. 혹시나 하고 이마를 짚어보았다. 펄펄 끓었다. "치민 아. 괜찮니? 응?" 놀라서 자는 아이를 흔들어 깨웠다. 나만큼 예민해서 평소엔 금방 깨던 아이가 몇 번 몸을 흔든 뒤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자는 게 아니라 거의 혼절해 있는 것 같았다. "어디 아파?" "속이 메슥거려, 고모." "그래? 토하고 싶어?" 힘이 없는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를 안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 앞에 앉히자마자 폭포처럼 오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아이는 내 품에 안겨 정신을 잃었다. 아이 아버지는 출장 중이었다. 자다가 놀라서 눈을 비비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정신없이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주사를 맞은 아이는 금세 정신이 들었다. 병명이 무엇인지,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은 이유 없이 그런 일이 종종 있다고 했다. 아마도 신경성일 거라고. 병원에서도 관장을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변비를 대충 잡기는 했지만 도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도 3일 정도 변을 못 본 상태였다. "꼭 관장을 해야 돼나요?" 나도 변비가 심해 몇 번 관장을 해봤지만 아이가 견디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하는 게 좋습니다. 속에 변이 차 있으면 토하는 증세가 더 심해지고 열도 잘 내리지 않거든요." 항문으로 호스를 끼우는 끔찍한 고통을 이제 겨우 다섯 살 된 치민 이가 견뎌야 한다니. 나만 믿는 치민 이는 그날도 퀭한 눈으로 끔벅끔벅 나만 보고 있었다. "치민 아. 이제부터 안 아프려면 똥꼬에 뭘 넣어야 된대. 저번에 집에 싱크대 막혀서 고모가 청소하는 것 봤지? 싱크대 구멍이 막히면 물이 안 내려가서 더러워지잖아? 그것처럼 치민 이도 깨끗이 청소를 해야 안 아프대. 만이 아플 텐데 참을 수 있지? 고모가 옆에 있을 게." 치민 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리디 여린 아이의 항문으로 호스를 끼우는 일이 시작됐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치민 이가 처음으로 눈물을 쏟았다. 아직도 자기를 제대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치민 이는 소리를 지르지는 못했다. "고모, 고모. 나 아파, 아파." 엎드린 채 고개를 쳐들고 나를 찾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치민 이를 보는 것은 고문이었다. "그래. 고모 여기 있어. 조금만 참아. 응?" 치민 이의 작은 손이 아프게 내 손을 파고들었다. 치민 이도 울고 나도 울었다. 할 수만 있다면 치민 이가 겪는 모든 고통을 내가 대신 해주고 싶었다. 물론 나는 치민 이를 낳는 산고를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약을 먹고살아야 하는 내 육체에 녹아든 아이는 독특한 융합작용을 통해 한 어머니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버지 없이 살아야 했던 내 피와 어머니 없이 살아야 하는 치민 이의 피는 같은 것이었다. 남자와의 사랑에도 헌신은 있다. 하지만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나는 이기심으로 괴로워하는 자신과 싸워야 했다. 그가 온전히 내 것일 수 없었을 때,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은 했지만 내 영혼을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고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겐 오직 헌신만 있을 뿐이었다. 타자인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 그 사랑이 벽에 부딪혔을 때 내가 택한 건 죽음이었다. 나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비로소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고 있었다. 여자에게 있어 아이란 본질이었다. 나는 여자보다 위대한 어머니가 돼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된다는 건 몸의 희생보다 더 큰 걸 필요로 한다는 걸 그땐 몰랐다. 치민 이가 점차 회복되면서 내가 시를 쓸 수 있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1995년 가을 드디어 두 번째 시집 <난간 위의 고양이>가 나왔다. 치민 이를 돌보면서 쓴 이 책은 내게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이 책으로 나는 그해 연말 한국일보가 선정한 평론가 5인이 추천한 '올해의 우수 시인'으로 뽑혔고, 시집은 출판저널이 선정한 우수 도서 추천을 받았다. 얼마 후 전화가 왔다. "잘 지냈니?" 꿈에도 잊지 못하던 목소리였다. 정신이 아득했다. 마음에도 천길 낭떠러지가 있어 까마득 한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쌓이고 쌓인 그리움이 너무 깊은 탓일까.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몽롱했다. 도무지 현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네… 잘 지내셨어요?" "그래. 네 시 다 읽었다. 좋은 시를 쓰더구나.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시였어. 서원아. 네가 자랑스럽다. 네 아버지도 기뻐하실 게다." 자애로운 목소리. 그는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몇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웃고 있었다. 지상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사랑은 이런 것이었을까?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를 만나 작은아버지와 조카가 되고 마침내는 연인이었다가 먼길을 돌아 다시 작은아버지와 조카로 마주 선 우리. 어둠에 갇혀 있던 한 아이를 여자로, 시인으로 만들어준 그 사람.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이미 주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그날 밤 노트 몇 권 분량의 편지를 불살랐다. 눈물과 원망과 그리움으로 점철된 편지. 그가 떠난 날부터 거의 매일 썼던 편지였다. 남편이 잠든 방에서, 혹은 남편이 일 나간 빈방에서, 혹은 치민 이를 업은 채. 하나의 편지가 불길에 싸여 한줌 재로 변할 때마다 그리움에 지쳐 병든 추억이 하나 까맣게 타오르고 밤하늘로 사라져 갔다. 이제 정말 당신을 놓아드릴게요. 결혼으로도 놓아줄 수 없었던 당신을 놓아드릴게요. 지난 10년간 당신을 사랑했던 마음은 내 시 속에서 영글고 치민 이를 향한 사랑 속에서 열매를 맺을 거예요. 이제 욕망이 가신 말간 눈으로 당신의 삶을 지켜볼게요. 당신이 멀리서 내 시를 지켜보았듯. 당신은 내 고통스러운 젊음의 전부였어요. 신산스러운 내 삶에 당신이 사랑으로 지펴주신 환한 빛이 평생 나의 등불이 돼줄 거예요. 고마워요. 나의 당신. 볕 잘 드는 집 봄에 우리는 1층집으로 이사했다. 온 집안 구석구석 햇살이 환하게 쏟아지는 집이었다. 따스한 햇살 속에서 우리 가족은 밝은 세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당에 은은한 라일락 향이 퍼져나가던 화사한 봄날 나는 이제 치민 이를 유치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치민 이도 친구들과 어울려 자기 또래 세계를 형성해야 하지 않을까. 멍하게 넋을 놓는 버릇이 남아 있긴 했지만 치민 이는 이제 정상이었다. 그 무렵 치민 이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아이를 낳아달라고 성화였다. "고모, 아기 하나만 낳아 줘. 응? 다섯 살짜리로." 치민 이가 좋아하는 스파게티를 만들다 말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섯살짜리는 왜?" "친구 하게." 얼마 전부터 치민 이는 우리가 자주 다니는 동네 슈퍼의 다섯 살배기 상원 이와 곧잘 어울려 놀았다. 내 등에 업혀 상원 이와 앞을 익힌 치민 이는 귀염성 있고 서글서글한 상원 이와 차츰 가까워졌다. 치민 이에게는 난생 처음 사귀는 친구였다. 우리 집에서 한나절을 함께 놀던 상원 이를 집에 데려다줄 때마다 치민 이는 자고 가라고 자꾸 붙잡았다. "응? 고모오. 다섯 살 짜리 동생 낳아 줘." "치민 아. 다섯 살 짜리 아기는 낳을 수 없어. 낳을 때는 다 갓난아기야. 그러니까, 치민 이 유치원 가면 어떨까? 거기 가면 상원이 같은 친구들 많이 있는데." 치민 이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귄다는 게 두려운 모양이었다. 유치원을 알아보았다. 입학 시기는 약간 지났지만 사정 얘기를 들은 한 유치원 원장이 흔쾌히 치민 이를 받아주었다. 처음에는 안 간다고 떼를 쓰더니, 치민 이는 별문제 없이 유치원에 잘 다녔다. 그래도 아침에는 아프다고 꾀병을 부렸다. "나 유치원 안 갈래." "우리 치민 이가 왜 또 그럴까?" "아파." 치민 이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빼꼼히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 어디 보자." 나는 이마를 짚어보는 시늉을 했다. "어머! 조금 아프네. 그런데 고모가 업어주면 다 낫겠다. 고모가 유치원 버스 타는 데까지 업어줄게." 그제야 치민 이는 일어나서 유치원 갈 준비를 했다. 유치원이 끝나고 차가 올 무렵이면 매일 치민 이를 마중 나가는 게 내 일과가 됐다. 매일매일 보는데도 차창 밖으로 내가 보이면 치민 이 얼굴엔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그해 여름이었다. 모처럼 시내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나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 없이 나 혼자 집을 나서본 지 1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혼자 나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먹고 싶은 것이라도 있나 물어보려고 치민 이를 찾았다. 그런데 늘 짚 앞 골목에서 놀던 치민 이가 보이지 않았다. 치민 이와 또래 아이들의 웃음으로 떠들썩하던 집 앞 골목길엔 한낮의 고요만 무겁게 깔려 있었다. 동네 슈퍼에서 어머니가 나왔다. "엄마, 치민 이 못 봤어?" "왜? 애가 어디 갔니?" "집 앞에 없잖아? 한 번도 혼자 멀리 간 적이 없었는데…." 어머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순간 치민 이에게 사고가 난 건 아닐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골목을 조금 벗어난 행길가에서 아이들이 교통사고로 다쳤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찾아보자." 슈퍼 부근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너희들 치민 이 못 봤니?" 아무도 치민 이를 본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차가 다니는 행길쪽으로, 나는 놀이터로 치민 이를 찾으러 나섰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헤매며 치민 이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동네 오락실이란 오락실은 다 뒤졌다. 얼마나 찾아다녔을까. 온몸에선 땀이 비오듯 흐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헐떡거리며 집 쪽으로 가다가 어머니와 마주쳤다. "그쪽에도 없어?" 어머니 역시 땀을 뻘뻘 흘리며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골목 어귀로 들어서는 치민 이가 보였다.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도 잠깐,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옆집 담 너머로 휘어져 내려온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치민 아! 고모가 뭐랬어? 멀리 가지 말라고 했지? 멀리 나가 놀려면 고모한테 꼭 얘기하고 가라고 했어, 안 했어?" 나는 그 나뭇가지로 사정없이 아이를 때렸다. 아이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는지 놀란 표정이 됐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얘, 그만해라. 찾았으니 됐잖니." 어머니가 말렸지만 내 손은 멈춰지지 않았다. 몇 대를 때렸을까. 갑자기 맥이 빠졌다. 손을 멈추고 주저앉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약속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치민 아. 멀리 가지 말라고 했지! 사고 난 줄 알았잖아." 울컥울컥 넘어오는 울음 때문에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고모, 잘못했어." 치민 이도 나를 따라 서럽게 울었다. 아이 종아리를 들여다보았다. 나뭇가지로 맞은 자리에 벌건 자국이 나 있었다.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가뜩이나 여린 아이를 이렇게 때리다니. 안 그래도 상처 잘 받는 아이를 이렇게 심하게 때리다니. 아이는 잠시 후 울음을 그쳤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저 어린 걸.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우는 나를 어머니가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전화벨이 울렸다. 약속한 친구였다. "미안해. 치민 이가 아파서 못 나가겠어." 나는 다음에 만나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치민 이 다리를 물로 씻긴 다음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고모가 잘못했어. 우리 치민 이 많이 아팠지?" "고모, 안 나갈 거야? 그럼 나랑 레고 하고 놀자, 응?" 아이는 상처난 다리가 따가울 텐데도 내가 안 나간다는 게 좋은지 매 맞은 것도 다 잊어버린 환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한평생 근심걱정을 짊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그날 알았다. 치민 이 유치원 차가 5분만 늦어도 혹시 교통사고가 난 게 아닐까 사위스러운 생각부터 먼저 들고, 감기에 걸려 조금만 열이 올라도 이러다 폐렴이 되는 건 아닐까 속이 타는 게 바로 어머니로 첫발을 떼는 과정임을 그날 알게 된 것이었다. 육십 먹은 아들한테도 차 조심하라고 이르는 노모의 걱정처럼 숨이 끊어져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자식에 대한 염려로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는 것이 바로 어머니들 아닐까. 그날 밤잠자리에 누운 치민 이 곁에 앉아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낮에 때렸던 일이 마음을 너무나 무겁게 했다. 그 일로 아이 마음에 상처가 남았으면 어쩌나, 자다가 무서운 꿈을 꾸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악몽을 자주 꾸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하지만 치민 이는 언제 혼났냐는 듯 말간 얼굴로 내 잠옷자락을 잡아당긴다. "고모는 왜 안 누워? 여기 누워. 어서." 자기 옆에 나를 눕혀놓고는 얼른 옆구리를 간질이며 깔깔거린다. "낮에 고모한테 맞은 데 아프지?" "아니, 안 아파." "치민 아, 아까 고모가 때려서 정말 미안해. 우리 치민 이 많이 놀랐지?" "아니, 나 괜찮아. 고모, 나 다음부터 절대 안 그럴 게." 치민 이가 씩 웃어 보인다. 겨우 여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어찌 이렇게 속은 깊은지…. "생각해보니까, 우리 치민 이는 수호천사가 지켜주시는데 고모가 괜히 걱정하고 그랬어." "수호천사가 뭔데?' 치민 이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본다. "응. 수호천사는 반짝이는 하얀 날개를 가졌는데, 치민 이 같이 어린아이들을 지켜주시는 천사야." "그럼, 고모는? 고모는 누가 지켜 줘?" 제 고모를 아무도 안 지켜줄까봐 걱정인가보다. 나는 웃으며 발그레한 치민 이 볼에 입을 맞춘다. "응. 고모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지켜 줘." "가브리엘 대천사가 뭔데?" "천사들 중에 대장 천사."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는 금세 잠에 빠져든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성모님, 우리 치민 이를 위해 빌어주소서. 우리 치민 이를 위해 빌어주소서…. 때론 잠든 아이 곁에서 내 불행했던 유년과 뼈아픈 나날들이 기억에 사무쳐 숨죽여 설움을 토해낼 때로 많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면 나도 모르게 한줄기 빛이 가슴에 스며든다. 하느님, 제게 오늘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이 아이를 위해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옵소서. 이 아이에게 하늘의 사랑과 이 세상의 사랑까지도 가르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